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 사랑에 대한 진리를 우리가 이전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풍요롭게 분석했다. 아가서를 혼인의 가시적 표징인 몸의 언어를 올바르게 읽는 것에서부터 해석해 혼인의 성사적 표지를 이해하도록 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들을 결합시키고 지속시키는 사랑은 영적임과 동시에 관능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대의 젖가슴은 야자 송이 같구려. … 그대의 젖가슴은 포도송이, 그대 코의 숨결은 사과, 그대의 입은 좋은 포도주 같아라.”(아가 7,8-10) 두 연인은 서로가 선물임을 발견하며 체험한다. 감각적이고 관능적이지만, 몸의 언어와 서로를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몸의 뿌리는 영적인 사랑이다. 마음이 참된 사랑을 갈망하고, 갈망은 몸의 감각으로 이어져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의 울림을 듣는다.
아가서 7장은 가장 관능적이고, 8장은 완전히 신학적이다. ‘몸의 언어’인 에로스는 끊임없이 어딘가로 향하는 사랑을 드러낸다. 밤에도 멈추지 않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그 무엇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열망과 긴장, 탐색에서도 사랑의 얼굴이 드러난다.(아가 2,17; 3,1-2; 5,6.8 참조)
관능이 넘쳐남에도 경건함이 드리워져 있다. 참된 사랑의 신비, 곧 거룩함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에게 열린 이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선 성(性)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다. 몸·성·사랑에 관한 올바른 앎이 자신을 제대로 세울 수 있고, 타자 또한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잡히지 않는 욕망에 대한 두려움도 정화의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과정은 하느님 신비로 넘어가기 위한 참으로 가치 있는 고통이요 견딤이다.
‘표징’에서 드러난 인간적 실재가 ‘계약과 은총’의 신적 실재를 표현한 것이라면, 에로스는 자신의 완성을 바라보고, 완성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아가페)이 에로스를 이끈다. 도착점에 대한 황홀함이 현재를 자극하고 이끈다. 그 여정에서 에로스는 모든 착복이나 지배 단계들을 초월하고, 소유와 욕망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것들에서 초월해 나간다.
“내가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고 제발 그이에게 말해 주어요.”(아가 5,8)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는 것은 에로스의 한계(몸의 약함, 죽음, 정열)를 뜻한다. 몸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사랑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다. 교황은 연약한 몸의 제한성을 볼 때 ‘사랑은 몸이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고, 사랑의 무한함은 몸의 유한함에 비해 대단히 거대한 것이기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몸은 ‘부서지거나, 폭발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의 사랑이 그랬다.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 인간 몸에서 폭발한 것이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아가 8,6) 사랑은 결코 죽음에 굴복하려 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교황은 아가서가 세계의 어떠한 문학보다 가장 ‘적절하고 아름다운 표현’이라 말한다.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아가 8,6) 격렬한 불길은 큰 불길, 성령의 불꽃을 뜻한다. 결국 인간적 사랑과 신적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하나에서 출발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에로스가 신적 친교를 세상에 드러내는 표징이 되기 위해선 몸의 언어가 전례 언어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전례 안에서 신과 인간, 하늘과 땅의 ‘입맞춤(만남)’이 비로소 이루어지고, 그 절실함도 우러나기 때문이다.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가슴에,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팔에 지니셔요.”(아가 8,6)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