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라는 외침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히브리어 ‘할랄(???, 찬양하다)’과 하느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야(??)’가 결합된 말, 곧 하느님을 향한 가장 큰 찬미의 호응이다. 이 외침이 터져 나오는 까닭은 분명하다. 대탕녀 바빌론이 마침내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바빌론을 경제적 사치와 부의 폭력으로 이해해 왔다. 바빌론으로 은유 되는 로마의 번쩍이는 문명 뒤편에서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뜻을 외면한 제국의 욕망을 가차 없이 고발했다.(17?18장)
이제 그 고발은 한 시대의 끝맺음으로 응답받는다. “당신 종들의 피를 되갚아 주셨다”(묵시 19,2)는 표현은 열왕기 하권 9장 7절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이제벨의 손에 죽은 나의 종 예언자들뿐 아니라 주님의 모든 종의 피를 갚게 해야 한다.” 구약 전통에서 피의 복수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이들에게 내리는 최종적 심판의 은유였다. 그리고 그 심판은 되돌릴 수 없는 멸망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 여자가 타는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묵시 19,3)는 표현이 바로 그 비극적 결말을 연기로 형상화한다.(이사 34,14; 묵시 14,11 참조)
스물네 원로와 네 생물이 다시 등장한다. 요한 묵시록 4~5장에서 천상과 지상의 만남을 상징하던 이들이, 바빌론의 몰락 앞에서 또다시 하나의 찬미로 모인다. 그 하나 됨의 중심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이 찬란히 서 계신다. 그래서 그들의 외침은 자연스레 “아멘, 할렐루야!”(묵시 19,4)가 된다. 시편 106편 47절의 외침처럼, 이야기의 모든 흐름은 하느님을 향해 수렴되어 간다.
5절은 그 장엄한 찬미 안으로 더 많은 존재가 초대됨을 보여 준다. 하느님의 모든 종, 낮은 이든 높은 이든,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은 모두 그 찬미 안으로 부름을 받는다. 마지막 시대에 모든 존재가 하느님을 향해 노래하게 된다는 이 장면은 종말 묘사의 오랜 전통을 잇는다. 그 찬미의 소리는 거대한 물살 같고, 굉음의 천둥 같고, 무수한 무리의 목소리 같다.(시편 113,1; 134,1; 135,2 참조) 하느님은 온 우주의 주권자로, 모든 피조물의 목소리를 모아 하나의 찬가로 빚어내신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심은 곧 하느님에서 어린양으로 이동한다. 어린양의 혼인날이 도래했고, 신부는 이미 단장을 마쳤다.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아내로 그리던 예언자들의 오래된 이미지(호세 2,16; 이사 54,6; 에제 16,7?8 참조)는 이제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공동체의 관계로 확장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셨고(마르 2,19?20; 마태 22,1), 바오로는 이 이미지를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2코린 11,2)
어린양의 신부는 특정 집단의 특권적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낸 모든 이들의 이름이다.(묵시 5,9; 7,14; 14,3?4 참조) 신부가 몸단장을 마쳤다는 표현은 세례의 은총으로 깨끗해진 교회 공동체를 떠올리게 하지만(에페 5,26?27), 그 은총은 특정 제도나 사람들의 이름으로 독점되지 않는다. 이미 앞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모든 이들’을 향해 열려 있었고, 바빌론의 몰락과 함께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권세가 종말을 맞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는 약하고 상처투성이지만, 어린양의 승리는 우리의 나약함을 충분히 넘어서는 영원한 구원이다.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 모든 민족이 속량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묵시 5장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입은 “고운 아마포 옷”(묵시 19,8)은 우리에게서 비롯된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입히신 의로움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된 이들은 행복하다. 묵시록을 시작하며 우리는 이 책이 ‘행복’을 위해 쓰였음을 기억한다. 그 행복은 세상이 약속하는 부·명예·권력의 언어에서 찾을 수 없다. 하느님과 어린양과의 일치, 상호 개방과 존중, 그리고 끝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야말로 요한 묵시록이 가리키는 행복의 자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요한 묵시록을 읽으며 이런 사실을 알아차렸어야 한다. 하느님의 편과 어린양의 자리에서 흐르는 것은 언제나 ‘보편’의 은총이며, 용과 짐승과 대탕녀 바빌론의 편에 흐르는 것은 오직 ‘배타성’과 그로 인한 폐쇄적 집착뿐이라는 것을.
10절에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로 소개된다. 그들은 천사와 같은 위상을 부여받지만, 천사의 권위는 더 이상 인간을 압도하는 초월적 위치가 아니다. 천사는 인간과 함께 하느님을 섬기는 ‘동료 종’으로 자리매김한다. 하느님을 따라 사는 이들, 하느님의 구원 안에 초대받은 모든 이는 하느님 앞에서 동등하다. 바빌론의 멸망은 인간 사이를 가르던 모든 폭력과 차별, 그리고 혐오와 배제와 증오가 사라져야 한다는 하느님의 의지를 다시 선포하는 일이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승리해야 할 것은 세상의 경쟁이 아니라,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교수가 말한 한 문장이 이 지점에서 더욱 깊게 와닿는다.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일은, ‘평상시’에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덜 고귀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유사시’에 돈도 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이 돈 많고 힘 있는 이들의 사랑을 지키는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니까 평화를 함께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인생의 역사」 168쪽)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