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0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후리사공소, 기해박해 때 백운산 용수골에 형성된 교우촌

[리길재 기자의 공소(公所)를 가다] 3. 원주교구 구곡본당 후리사공소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원주교구 구곡본당 후리사공소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인근 매지리 분지동과 문막 서지마을 일대 신자들이 숨어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일군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후리사공소 전경.

지금까지 밝혀진 기록에 의하면 강원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가톨릭 신자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 최한기이다. 최양업 신부 집안의 신앙 내력은 최 신부의 친필 편지와 그의 조카 최상종(빈첸시오)이 쓴 「최양업 신부 이력서」와 「최우정 바실리오 이력서」, 최 신부의 넷째 제수 송 아가타가 구술한 「송 아가타 이력서」를 통해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이 기록들을 종합하면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 최한일과 그의 동생 최한기가 1787년 한양에서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얼마 안 가 최한일은 선종했다. 1791년 신해박해의 고초를 겪은 후 최 신부의 증조모는 12살 외아들 인주와 함께 충청도 홍주 누곡(樓谷) 곧 청양 다락골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최한기의 가족들은 강원도 홍천으로 피신했다가 지금의 풍수원에 자리 잡았다.
후리사공소 제단. 제대와 나무 십자가, 감실과 한복 입은 성모상이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1801년 옥사한 이가환 일가 매지리로 이주

강원도에 가톨릭 신자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다. 교회 재건에 앞장섰던 복자 신태보(베드로)는 1802~1803년께 다섯 집안의 순교자 유족 40여 명을 이끌고 풍수원으로 숨어들었다. 이 시기 또 한 무리의 일가가 백운산과 치악산 협곡을 끼고 있는 원주 흥업면 매지리(梅芝里)로 이주했다. 신유박해 때 천주교 우두머리로 체포돼 옥사한 금대(錦帶) 이가환의 일가였다.

이가환은 정조 임금이 ‘정학사’(貞學士)라 부를 만큼 당대 제일의 천재였다. 그는 충청도 덕산(오늘날 예산군 고덕면) 출신이다. 여주 이씨 집안이 덕산 상장리와 지곡리에 살기 시작한 것은 이가환의 증조부 매산(梅山) 이하진 때부터다. 이가환은 이곳에서 삼촌인 정산(貞山) 이병휴와 함께 할아버지인 성호(星湖) 이익의 성리학을 계승했다.

이가환은 이승훈(베드로)·정약용(요한 사도)·이벽(요한 세례자)·권철신(암브로시오)과 각별했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다. 곧 이가환의 누이가 이승훈의 어머니이다. 이승훈의 부인은 정약용의 누나이다. 이승훈과 정약용은 ‘처남 매부’ 간이다. 또 이벽의 누이가 정약용의 큰 형 정약현의 부인이다. 황사영(알렉시오)의 부인 정명련(丁命連, 난주, 마리아)이 이들 부부의 맏딸이다. 따라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약용 형제는 황사영의 처삼촌이다. 또 이벽은 이병휴의 문하생으로 덕산을 드나들었고, 이가환·권철신과 천주학을 공부했다.

1795년 5월 11일 한양 계동 최인길(마티아)의 집을 급습해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그해 7월 말 ‘사학삼흉’(邪學三凶)으로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금정찰방으로 좌천되고, 이승훈은 예산으로 유배됐다. 이후 1801년 2월 이가환과 권철신은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옥사했고, 이승훈은 정약종·최창현(요한)·최필공(토마스)·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홍낙민(루카)과 함께 2월 26일 한날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 순교했다. 이승훈만 제외한 이날 모든 서소문 순교자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한편 이가환의 시신은 고향인 덕산에 묻혔다가 1987년 매지리 매산묘원(梅山墓園)으로 이장됐다. 이곳엔 이하진을 비롯한 그 후손들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후리사공소 내부. 양쪽 벽면에 창을 내어 낮 동안 햇살이 공소 안으로 스며들게 해놓았다.

용수골공소에서 후리사공소로 명칭 변경

이가환 일가가 가톨릭 신앙 때문에 이곳 원주 흥업면 매지리로 이주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주문모 신부 실포 사건’이 계기가 돼 1797년 정사박해가 충청도 일원에서 일어나자 이 지역 가톨릭 신자들이 강원도 깊은 산골로 숨어든 것은 사실이다. 더불어 신유박해 때 경기도 여주에 살던 가톨릭 신자들이 인근 원주 일대 깊은 산속 험한 골짜기로 피신해 교우촌을 일구었다. 황사영이 박해를 피해 백운산과 구학산 연봉에 둘러싸인 배론으로 숨어들 수 있었던 것도 경기도와 충청도 교우들이 이미 숨어 살았기 때문이다.

매지리는 동쪽으로 판부면, 서쪽으로 대안리, 남쪽으로 귀래면, 북쪽으로 흥업리와 접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들이 조선 왕조 치하 박해를 피해 이 일대에 언제 숨어들어와 교우촌을 일구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01년 신유박해 이후로 점차 퍼져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매지리 분지동에 먼저 자리 잡은 가톨릭 신자들이 덕기산으로 숨어들어 가 대안리 교우촌을, 백운산 용수골 깊은 골짜기에 후리사 교우촌의 삶 터를 닦은 것이 그 증거다.

백운산 자락 원주시 판부면(板富面) 용수골길 335(서곡리 1650-2)에 원주교구 구곡본당 ‘후리사공소’가 있다. 원래 이름은 ‘용수골공소’였다. 1880년에 용수골공소가 설립됐다고는 하나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1893~1894년도 풍수원본당 통계에 “용수골공소 신자 29명”으로 기재돼 있는 것으로 보아 1893년 이전에 용수골공소가 설립된 것은 분명하다. 1953년 지금 자리에 공소 건물을 지으면서 후리사공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판부면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조선 시대 판제면(板梯面)과 부흥사면(富興寺面) 일부를 병합해 생긴 지역이다. 서곡리는 신라 진흥왕 때 이곳에 후리사(厚理寺)를 창건한 서곡(瑞谷)대사를 기려 이름 붙여진 마을이다. 또 용수골은 용이 승천한 깊은 웅덩이(龍沼)가 있는 전설의 골짜기라 해서 불린 이름이다.
마당 성모상. 후리사공소 마당에 성모상을 꾸며 가톨릭교회임을 드러내고 있다.
 
후리사공소 십자가의 길 14처. 양쪽 벽 창틀 사이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마련돼 있다.

박해 시기 강원도 교회의 중심지에 자리

이가환 일가가 자리 잡은 매지리 분지동에서 안쪽 산 능선을 넘으면 바로 판부면 서곡 용수골이다. 이들 중 일부가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용수골로 이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역시 기해박해 때 문막 손곡리 서지마을 교우촌에 살던 복자 최해성(요한)이 교우들을 덕가산으로 피신시켰는데 그들 중 일부가 용수골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종합하면 1839년 기해박해 때 용수골에 교우촌이 형성됐고,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전후로 공소가 설립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강원도는 1850년부터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였다. 당시 강원도 교우들의 80 이상이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와 인접한 원주·횡성·홍천·춘천·평창 등지에 거주했다. 그중 풍수원을 중심으로 한 횡성과 원주에 70 가까운 교우들이 거주했다. 풍수원과 원주 일대는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강원도 교회의 중심지였다. 어쩌면 최양업 신부 자취가 용수골에도 서려 있을지 모르겠다.

해발 1087m의 백운산(白雲山)은 늘 구름이 끼어있고, 겨울에는 흰 눈이 쌓일 뿐 아니라 서곡천 등 깊은 계곡들이 많고, 산줄기가 아주 넓고 길게 뻗어있어 여차하면 횡성·충주·제천 등지로 피신할 수 있다. 조선 왕조 치하 가톨릭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기엔 딱 좋은 곳이었다. 이곳에 정착한 가톨릭 신자들은 깊은 골짜기 맑은 물로 넓은 땅에 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우며 생활했다.

1952년 봄 당시 공소 회장 조상준(베르나르도)씨가 유엔군의 폭격으로 전소된 자신의 집터 400㎡를 새 공소 터로 기증했다. 휴전 직후 1953년 가을에 102㎡ 규모의 공소를 지었다. 공소 이름은 마을에서 제일 유명한 후리사 절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원주교구 원동주교좌본당 제17대 주임 이 바드리시오(Deery Patrick) 신부가 축복한 후리사공소는 1960년 12월 5일 단구동본당, 1998년 2월 17일 구곡본당 관할로 편입됐다.

후리사공소는 2005년 새 단장을 했다. 양쪽 긴 벽에 창을 내어 낮 동안 햇살이 공소 내부를 비추게 했다. 제단은 소박하다. 나무 십자고상이 제단 벽을 장식하고, 그 옆에 감실과 한복 입은 성모상이 설치돼 있다. 제대를 바라보고 왼편에 성모자상이 있다. 공소 주변으로 굵은 향나무가 자라고 있고, 마당에는 성모상을 꾸며놓아 이곳이 가톨릭교회 시설임을 알려주고 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12-10

관련뉴스

말씀사탕2025. 12. 10

로마 12장 10절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