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크트 마리엔탈 시토회 수녀원과 포도밭. 독일·폴란드 국경인 나이세강 중상류 좁은 범람원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1234년 설립 이후 전쟁·화재·홍수를 견디며 현재까지 이어져 온 독일 최고(最古)의 시토회 아빠티사좌 대수도원이다. 중세에 나이세강 일대의 큰 영지와 해당 마을의 본당 사제 서임권(Jus patronatus)을 가지고 있는 영적 중심지였다. 현재 국제 영성센터와 만남의 집으로 순례자와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국경 없는 유럽’이란 말을 자주 들어보셨을 겁니다. 솅겐 협정(Schengen Agreement) 덕분에 이웃 도시를 가듯 옆 나라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기에 생긴 말입니다. 유학 시절 알프스 쪽에 갈 때면, 독일보다 20 저렴했던 오스트리아 주유소에서 기름을 잔뜩 채우고 오곤 했죠. 국경에 파란 유럽연합(EU) 깃발과 표지판 하나뿐이었으니, 어떤 때는 국경을 넘는 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였습니다. 국경은 지도 위의 선에 불과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EU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수십만 명의 난민·이주민과 안보를 이유로 회원국마다 국경 검문과 임시 통제가 잦아졌습니다. 자유로운 왕래를 꿈꾸던 EU의 정신이 빛 바래져 가는 상황에서도 여러 나라의 학생과 교사·가족·신자들이 한데 모여 기도하고 평화와 환경을 꿈꾸는 곳이 있습니다. 1234년부터 한자리를 지켜온 장크트 마리엔탈 시토회 수녀원입니다.
장크트 마리엔탈 수녀원 안뜰과 삼위일체 기둥 분수. 왼쪽으로 아빠티사의 관저와 수녀원·성당이 있고, 오른쪽에 옛 마차 보관소를 개조한 게스트하우스, 수도원 성물방이 보인다. 성경에 언급된 약 110종의 식물 중 40종 이상을 재배하는 약 1030m² 규모의 수녀원 정원도 딸려 있다.
수녀원 성당 주 제단과 가대석. 1897년 홍수 후 성당 내부를 19세기 초 독일어권에 일어난 낭만주의·그리스도교 미술 운동인 나자렛 화파의 종교화로 새롭게 단장했다. 주 제단과 제대는 2010년 홍수 후 개축하여 2014년 10월에 새롭게 축복했다.
독일 최고(最古) 시토회 아빠티사좌 수녀원
드레스덴에서 동쪽으로 달리면 지형이 서서히 낮아지면서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을 이루는 나이세강이 나타납니다. 장크트 마리엔탈 수녀원은 이 강이 지나는 오스트리츠 남쪽 강 둔덕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독일 쪽에서 기차를 타고 가면 폴란드의 작은 역에 내리게 되는데, 여기서 폭 20m 남짓한 나이세강을 걸어서 건너오면 바로 오스트리츠입니다. 유럽 난민·국경 정책의 현실이 드러나는 곳 중 하나지요.
강변 길을 따라 20분쯤 걸으면 붉은 지붕 건물 단지인 장크트 마리엔탈 수녀원이 보입니다. 이곳은 독일에서 단 한 번도 공동체가 끊어진 적이 없는 가장 오래된 시토회 아빠티사(abbatissa)좌 대수녀원입니다. ‘아빠티사좌’ 수녀원은 수도회나 교구장의 지도와 감독을 받는 수도원이나 분원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수도원으로 인정받는 대수도원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회 수녀원이 아빠티사좌로 승격됐습니다.
나이세강의 수녀원 옛 돌다리(위)와 현재 모습(아래). 건너편 마을이 폴란드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나치 친위대가 수도원을 폭파하려는 걸 수도자들이 막았고, 다리만 폭파되었다. 국경이 생기면서 폴란드 쪽 수녀원 영지도 사라졌다.
보헤미아 왕비가 뿌린 겨자씨
전승에 따르면 수녀원은 1234년 10월 14일 보헤미아 왕 벤첼 1세의 왕비인 쿠니군데가 속죄의 봉헌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이듬해 수녀원은 공식적으로 시토회 보헤미아 관구에 편입되었고, 라우지츠 지역 귀족의 딸들이 입회하고 토지 기부 등 후원이 늘며 크게 성장합니다. 14세기 중반에는 중요한 경제·영적 중심지로 자리 잡지요.
시토회는 중세에 성 베네딕토가 말하는 ‘기도와 노동’의 이상을 더 엄격하게 준수하며 살려는 개혁 수도회로 등장했습니다. 당시 클뤼니 계열의 일부 베네딕도회가 풍요와 특권에 익숙해지면서 전례는 화려해졌지만, 검소한 생활과 노동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이에 시토회원들은 외딴 숲과 습지·강변의 황무지를 선택해 스스로 땅을 일구며 기도하며 사는 길을 택했지요.
개간과 수리에 능한 기도 공동체라는 평판이 서자, 교회와 세속 권력은 새로 일군 토지에 세금과 십일조를 깎아주고, 수도자가 직접 경작한 땅에는 십일조를 면제하는 등의 특혜를 주었습니다. 귀족들로서도 변두리 황무지를 시토회에 맡기면 개간으로 새로운 마을이 생겼기에 점점 시토회 쪽으로 토지 봉헌이 많아졌습니다. 그 결과 장크트 마리엔탈 같은 수녀원도 주변의 직영지뿐 아니라 나이세강을 따라 오늘날 폴란드 땅까지 꽤 넓은 지역의 마을과 십일조 권리를 지닌 큰 수도원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장크트 마리엔탈 수녀원 성당. 성모 승천에 봉헌된 후기 고딕 성당 위에 바로크 시대의 지붕과 창이 더해져, 시토회 특유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수녀원 슈츠베르크 십자가의 길. 14처 기도를 하며 정상의 십자가에 이르는 오르막길을 통해 시토회 오름의 영성을 체험하게 할 목적으로 1728년 수녀원 서쪽 언덕에 조성됐다.
‘오름’의 영성이 살아 있는 수도자의 마을
넓은 안뜰에 서면 웅장한 바로크 양식의 전면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 모습은 1683년의 화재 후 1740년대까지 재건한 것입니다. 아빠티사의 관저와 수녀원·사제관·성당·빵집·제분소·양조장·피정의 집 등이 마치 마을을 이루듯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언덕 위로는 독일 최동단(最東端)의 작은 포도밭이 보입니다.
수녀원 성당은 밖과 달리 바로크의 화려함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1897년 나이세강의 대홍수로 성당이 크게 손상되어 19세기 교회 미술인 나자렛 화파의 고딕·초기 르네상스풍 회화와 조각으로 다시 채웠기 때문입니다. 제대 뒤 그림 속의 성모님과 성인들이 조용히 제대를 향해 쳐다보고 있는데, 높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과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뒤를 돌아보면 회중석 뒤로 수도자들을 위한 별도의 층이 있습니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난간 위에 기도하는 성모상이 자리하고 있지요.
수도원 서쪽 언덕을 따라 중세 시토회 영성이 사랑하던 ‘오름의 은유’를 품은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14처가 끝나는 곳에서 나이세강과 수녀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수녀원 강 건너편으로 폴란드 마을이 보입니다. 1945년까지 돌다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수녀원의 연대기를 넘겨 보면 ‘홍수’와 ‘화재’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띕니다. 1427년에는 후스파와 십자군의 전투 속에서 완전히 불탔고, 종교개혁기에는 가톨릭 수녀원이면서도 관할 영지에 사제가 아닌 루터교 목사를 임명해야 하는 현실을 견뎌야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는 친위대에 의해 폭파될 뻔했죠.
전후 공산 체제 아래의 국유화 압박도 버텨냈으며, 2010년에는 나이세강의 큰 홍수로 다시 성당과 건물들이 물에 잠기곤 했습니다. 이런 굴곡진 역사를 견뎌낸 수녀원이 오늘 국경과 장벽을 넘어 사람들을 맞이하는 국제 영성센터로 거듭난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뒤에서 조용히 일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자연스레 묵상하게 됩니다.
<순례 팁>
※ 드레스덴/노이슈타트역 → 치타우역 → 폴란드 크셰비나 즈고젤레츠카역. 강 건너 도보 이동.(2시간 소요) 수녀원 입구에 주차장(500m)
※ 수녀원 전례: 주일 및 대축일 미사 09:00, 평일 07:15, 매일 다섯 번 시간 기도와 매주 목요일 성체 조배, 수녀원/국제센터 피정의 집 운영.(1인실~가족실)
※ 혼자 가시기 힘든 분을 위해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마련한 2026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