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박준양 신부- 교황청 교리 공지 「충실한 백성의 어머니」로 본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 수정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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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 마리애 교본 표지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 표현 대폭 수정
‘마리아 통하지 않으면 성령의 은총 받을 수 없다’를
‘마리아 도움으로 성령의 풍성한 은총을 받는다’로
‘성모 마리아에게 공동 구속자 호칭 부적절’에 따른 쇄신
성령 역할 마리아에게 배타적으로 귀속시키는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의 신학적 문제 바로잡기 위함
교황청 신앙교리부의 2025년 11월 4일 교리 공지 「충실한 백성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는 마리아의 ‘모성적 중재’는 독자적이지 않은 ‘참여적 중재’임을 강조하면서, 성모 마리아에게 ‘공동 구속자’(Co-Redemptrix)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밝힌다.
“구속 사업에 있어 그리스도께 대한 마리아의 종속적 역할”을 설명하며 “마리아의 협력을 규정하기 위해 ‘공동 구속자’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부적절하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이 호칭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 중개를 흐리게 할 위험이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 진리의 조화에 혼란과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기”(22항) 때문이다.
이는 구원사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명확히 제시하는 의미 깊은 교도권 문헌이며 사목적 차원에서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 활동해 온 레지오 마리애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은 “교회는 성모님을 (?) 은총의 중재자(Mediatrix in grace)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협력하시는 공동 구속자(Co-Redemptrix in salvation)로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와 닮은 분’이라고도 선언할 수 있는 것”(제7장, 72쪽)이라 강조하는데, 이제 그 진술이 수정될 단계에 온 것이다.
과거의 과장된 마리아 신심은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흠숭지례)과 마리아 공경의 신심(상경지례) 수준이 구분되기 어려울 지경이었고, 특히나 성령의 역할이 사실상 마리아에게 양도 혹은 귀속된 것처럼 보이는 게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현재 교본에는 과장된 마리아 신심의 흔적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교본의 신학적 기조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충분히 쇄신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충실한 백성의 어머니」는 성모 신심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빛에 비춰져 성찰돼야 함을 강조한다.
이에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3개(서울·광주·대구) 세나뚜스는 교본의 새로운 수정 번역을 진행하고 있다. 그중 시급한 문제는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이다. 행동단원이 되기 위해서는 입단 선서를 해야 하는데, 선서문은 교본 제15장(141~142쪽)에 정형화된 형태로 나온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로 시작하는데, 이후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계속 성령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이 선서문의 두 번째 단락에 신학적 문제가 있다는 점이 한국 교회 안에서 계속 지적돼 왔다.
“당신은 이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려고 오셨으나 성모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역사하지 않으시고 저희 또한 성모 마리아 없이는 당신을 알아 뵈올 수 없고 사랑할 수도 없음을 아옵니다. 당신은 저희에게 모든 재능과 성덕과 은총을 내려 주시오나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때에,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만큼,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방법으로, 베풀고 계심을 제가 아옵니다.”
이 내용은 레지오의 수호성인 중 한명인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1673~1716)의 책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25항과 206항에 기반한다. 그는 마리아가 성자와 성령에 대해 거룩한 은총의 관리자요 출납관이며 분배자가 되기에, 인간을 향한 은총의 중개와 분배는 마리아의 뜻에 달렸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 글을 오늘날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오직 마리아만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은총의 유일하고 배타적인 통로인가?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에페 1,3) 이러한 관점에서 ?충실한 백성의 어머니?는 명확한 대답을 제시한다. “그 어떤 인간도, 심지어 사도들이나 복되신 동정녀조차도 은총의 보편적 분배자로서 행동할 수 없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은총을 내려 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53항) 따라서 ‘모든 은총의 중재자’ 호칭 사용 역시 제한적이고 주의가 필요하며, 이는 “은총 질서에 있어 마리아의 모성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성화 은총을 받아들이게끔 도움을 준다”(46항)는 의미로 해석돼야 함을 강조한다.
선서문의 두 번째 단락은 수사학적으로 주관적인 강조 어법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선서문이라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고백 형식을 통해 그 내용을 천명하기에 문제가 된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서 이뤄지는 성령의 보편적 활동을 모두 마리아의 역할로 양도해 배타적으로 한정시키는 오류가 발견된다. 이는 사실상 마리아가 ‘공동 구속자’이며 ‘모든 은총의 중재자’라고 글자 그대로 인정하는 경우에만 가능한 진술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한국 레지오 마리애 3개 세나뚜스는 선서문의 수정 번역 시안을 마련해 주교회의에 제출했고, 2025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승인을 받았다. 2026년부터 전국 교구 레지오 마리애에서 새 번역문 시안이 사용될 것이며, 향후 다양한 의견 수렴을 거쳐 최종안을 마련해 주교회의에 다시 제출할 예정이다.
이 시안에서는 선서문 전체의 문장과 표현을 가다듬었다. 두 번째 단락을 ‘내용의 동등성’(dynamic equivalence) 원칙에 따라, 글자 그대로의 번역 대신에 의미 중심의 번역을 했다. 즉 ‘마리아를 통하지 않으면 성령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고 한 것을 ‘마리아의 도움으로 성령의 풍성한 은총을 받는다’로 바꾸는 방식이다.
선서문의 신학적 문제 제기는 레지오 마리애 운동에 담긴 신앙적 직관의 풍요로움을 감소시키려 함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레지오 활동을 하며 가톨릭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기에, 한국에서는 레지오가 단순히 하나의 신심 운동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교회에 그 공헌이 지대한 만큼 레지오 신심이 올바른 신학적 기반 위에 서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