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입학 후 입대 전 가족사진. 어머니와 누나, 형, 두 동생과 제정구(뒷줄 가운데).
강단 있고 고집 센 골목대장
당산나무 지킴이 구렁이 때려눕히고
집에서 쫓겨난 아홉살 개구쟁이
고등학생 땐 교내서 알아주는 싸움꾼
5수 끝에 받아든 서울대 합격통지서
난생처음 본 어머니의 ‘환한 얼굴’에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떠올리며
사람답게 살아야겠다 생각
“낙정댁! 정구 때문에 못 살겠어요.”
툇마루에 앉아 딱지를 접고 있던 나는 대문 밖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점심나절에 당산나무 아래서 딱지치기하다가 덩치 큰 녀석과 몸싸움이 벌어졌다. 엎치락뒤치락하다 내가 녀석의 배에 올라타 주먹을 날려 코피를 터뜨렸다. 필시 녀석이 집에 가서 훌쩍이며 일러바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치사한 자식!’을 되뇌며 부엌 뒷문을 통해 뒤꼍으로 달음질쳤다. 장독을 밟고 담장을 넘는 날렵한 족제비의 등 뒤로 카랑카랑한 하소연이 이어졌다.
나는 한 살 일찍 국민학교에 입학해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마침 한국전쟁이 터져 학교에서 해방된 것을 기뻐할 정도였다. 키나 몸집은 작았지만, 강단이 있고 완력이 세 또래의 대장 노릇을 했다.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수박이나 참외 서리를 하고, 남을 골탕먹이는 일에 골몰했다. 그야말로 「흥부전」에서 막 튀어나온 현실판 놀부라 일컬을 만했다.
3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날도 동네 아이들과 병정놀이하다 밭둑에서 구렁이와 마주쳤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지만, 조무래기들 앞에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나무칼로 황갈색 구렁이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구렁이가 커다란 머리를 치켜들고 입을 쩍 벌렸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물리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잽싸게 두 손으로 큰 돌을 들어 녀석을 향해 날렸다. 일격을 당한 구렁이는 머리를 풀썩 떨어뜨리며 밭둑에 늘어졌다. 악당을 물리쳤다는 기쁨은 잠시였다. 밤에 구렁이가 복수하러 집에 찾아올 것이 걱정이었다. 땅 냄새를 맡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구렁이를 덤불에 얹어놓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나를 찾아온 것은 구렁이가 아니라 마을 어른들이었다.
“아무리 짓궂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당산나무 지킴이를 때려죽인단 말이오?”
그날 나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회초리 세례를 받고 집에서 쫓겨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머니가 당산나무 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던 나를 찾아왔다. 그 구렁이가 진짜 죽었는지 확인하자며 나를 앞세웠다. 구렁이가 아들을 해코지할 것이 염려됐던 것이었다. 어머니의 살뜰한 마음이 움츠러들었던 몸에 봄볕처럼 스며들었다. 코가 찡한 와중에도 나는 속으로 골목대장을 변호하고 있었다.
‘치! 제 몸 하나도 못 지키면서 마을은 어떻게 지킨다는 거야?’
5학년이 되자 마침내 주먹으로 전교를 제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 살 터울의 형을 이겨먹을 수는 없었다. 형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그에 맞서 대들고는 했다. 어머니는 그런 형제를 똑같이 나무랐다. 눈치 빠른 형은 회초리를 한두 대 맞으면 엄살떨며 달아나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는 종아리를 붙들고 방바닥에 구르며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아이고, 엄마 아들 죽네’라고 호소하면서 말이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회초리를 내려놓고 혀를 찼다. 당산나무가 용으로 변해 방으로 들어오던 태몽을 떠올리며?.
“저 고집하고는. 하여간 큰일 낼 놈이야.”
나는 1944년 3월 1일 경남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제씨 집성촌 50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자실마을에서 남부럽지 않게 지냈다. 할머니는 폐결핵을 앓던 할아버지와 결혼한 후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 약으로 드릴 만큼 헌신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할머니는 아버지를 낳아 홀로 키우며 삯일로 백 마지기가 넘는 살림을 일으켰다. 후일 병든 할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모신 사실이 알려져 동네에 열녀비가 세워졌다.
엄격하지만 호인인 아버지 제병근 역시 효성이 지극해 고성 유림에서 상을 받아 열녀비 옆에 효자비가 나란히 섰다. 반면 택호가 낙정인 어머니 박수연은 억척스럽고 대범해 후일 ‘호랑이 할머니’라 불렸다. 두 분 사이에서 정수 누나와 정호형과 나, 그리고 동생 정무와 정원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12살 되던 해 추석 무렵에 돌연 세상을 떠났고, 교육열이 남다른 어머니가 기울어가는 집안 살림을 꾸려나갔다. 네 아들은 모두 진주로 유학 보냈고, 딸은 서울대학교 입시에 낙방한 자형에게 시집보냈다.
나는 진주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골목대장 기질을 버리지 못했다. 자취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군것질거리를 서리해다 먹으며 지냈다. 그 무렵 4·19혁명으로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 폭력 서클이 유행이었다. 나는 서클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센 주먹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진주농고의 폭력 서클 무리가 우리 학교를 기습했다. 유리창이 깨지고 비명이 난무했다. 나는 비호처럼 몸을 날려 친구들을 이끌고 교실을 나섰지만, 선생님들의 만류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치욕을 덮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튿날 우리는 진주농고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삽과 곡괭이를 들고 메뚜기떼처럼 몰려나오는 녀석들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남강 다리까지 밀려 대치했지만,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멩이를 당할 재간이 없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나 홀로 일어서 단옷날 석전(石戰) 하듯이 용감무쌍하게 돌팔매질을 했다. 점차 날아오는 돌이 적어졌다. 휴전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일로 인해 나는 싸움꾼들 사이에서 꽤 괜찮은 녀석으로 인정받게 됐다. 작은 체구로 황소와 맞서 싸웠다던 불도그처럼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통했던 것이다.
도시 빈민의 대부 제정구(바오로, 1944~1999)
나는 누나와 결혼한 이듬해 서울대에 합격한 자형을 잘 따랐다. 한학을 공부한 자형은 방학 때면 우리 집에 와서 지내며 내게 사서삼경 구절을 가르쳐주었다. 그때부터 나도 자형이 다니는 학교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1962년 진주고를 졸업한 이래 서울대 법대·공대 등 학과를 바꾸어가며 응시했지만, 무려 4번이나 보기 좋게 떨어졌다. 나는 오전에는 권투·태권도·역도 도장에 가서 울분을 풀었고, 오후에는 남강에 나가 시간을 보냈다.
만화방창의 따스한 봄날이나 녹음이 우거진 쾌청한 여름날, 단풍으로 물든 청량한 가을날이면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날 다정한 청춘남녀를 보면 공연히 심술이 사나워졌다. 시비를 걸어 상대가 대거리해오면 오전에 갈고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면 잠시나마 속이 후련해지고, 세상이 내 발아래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야말로 날건달이 따로 없었다.
그런 낌새를 눈치챈 형이 나를 서울로 데려가 학원에 등록시켜 주었다. 다섯 번째 시험을 치르기 두 달 전이었다. 시험 때면 아는 문제를 실수하거나, 답안지에 미처 답을 옮겨 적지 못하거나, 체력장에서 엉덩방아를 찧어 고배를 마시고는 했다. 학원에서의 체계적인 공부는 그런 두려움이나 걱정을 씻어 주었다. 마침내 나는 1966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늘 그래왔듯이 합격자 발표날 남강에서 목욕재계하고 집에서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끝내 합격 소식이 안 오자 제사상을 부숴버리고 말았다.
“조상님이 자손을 돌봐주지 않는데, 제사는 무슨 제사야!”
마침내 합격 소식이 도착했다. 어머니가 매일 올리던 부뚜막의 정화수, 사찰의 불공, 조상님 제사가 마침내 효험을 본 것일까. 합격통지서를 받아든 어머니의 얼굴은 앞산에 퍼지는 아침 햇발만큼이나 눈부셨다. 난생처음 보는 어머니의 환한 얼굴은 나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었다. 못된 짓만 골라 하고 다니던 아들을 말없이 기다려준 어머니가 더없이 고마웠다.
비로소 사람답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 시간에 얼핏 본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그림이 스쳐 지나갔다. 까까머리에 누더기를 입고 신발마저 벗겨진 채 집에 돌아온 방탕한 아들을 애처롭게 보듬고 선 아버지의 모습이?. 뜨거운 눈물이 깡마르고 까칠한 탕자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