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은 남을 불쌍히 여겨 도움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타인을 위한 이 행위는 전 세계 곳곳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케임브리지 대학 마이클 노턴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자선은 오히려 행위 주체에게 더 큰 행복감과 업무 능률을 가져다 준다고 한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 자선의 의미는 더욱 깊다. 단순한 동정이나 불쌍함이 아닌 ‘아낌없이 베푸는 사랑’이다. 자기 만족이나 선행의 기쁨을 넘어 신자로서 자연스럽게 행해져야 하는 삶의 방식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 6,3)는 말씀은 바로 그런 자선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일에도 경계가 필요하다. 꼭 자선을 받아야 할 이들에 대한 공격과 혐오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 약자에 대한 증오, 외모와 다름에 대한 배제는 이 사회의 병증이 심각하게 진행 중임을 보여준다. 특히 일부 정치인이 표를 얻기 위해 내뱉는 천박한 말들은 이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그런 말에 동조하면서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 부끄러움과 절망이 함께 밀려온다. 가장 낮은 곳에서 어려운 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신 주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자선도 크게 줄었다고 한다. 나라가 어렵고 개인의 삶도 팍팍해졌다는 이유를 든다. 그러나 우리 삶에 ‘풍족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적이 과연 있었는지, 먼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여유가 있을 때 나누는 것도 물론 귀하다. 하지만 진정한 자선이란 그것뿐일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주해」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자의 잉여는 가난한 이에게 필요한 몫이다. 잉여를 소유하는 자는 남의 몫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말을 하면 사회주의자 취급을 받을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진리를 말하던 성인의 용기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자선과 관련된 음악은 많지만, 특히 헨델의 ‘메시아’를 언급하고 싶다. 예수님 생애를 담은 이 작품이 왜 자선과 연결되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그러나 ‘메시아’는 원래 청각장애인을 위한 병원의 운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작곡된 작품이다. 청각장애인을 위해 음악가가 자선 기금을 모았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음악이 지금까지도 크리스마스 자선 음악회의 대표 작품으로 연주되고 있다는 점은 더욱 의미 깊다.
연주회를 기획하며 장애인 관객들을 초청하곤 했다. 그중 청각장애인 분들을 모실 기회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들리지 않는 음악회가 필요할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우리의 편견을 부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음악을 ‘상상’하며 연주자들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고, 우리가 감히 생각하지 못한 깊은 열정과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듣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우리가 얼마나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는지, 또 상상의 음악을 즐기는 그들의 세계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깨닫게 되었다.
‘메시아’는 그들을 위해 태어났고 앞으로도 그 의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대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애쓰는 것이 바로 자선임을 기억해야 한다.
제프리 토마스 지휘, 헨델 ‘메시아’ 전곡
//youtu.be/2-QV_I-xseA?si=tN72tWlJkzg86g1d
작곡가 류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