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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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투사 “예수님 따르는 구도자로 살겠다” 결심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도시 빈민의 대부, 제정구 바오로 - (2) 민주투사의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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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구(오른쪽)와 정일우 신부.


교련 반대 시위로 수배·도피하다 제적

청계천 판자촌 교회서 야학교사 활동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 형 받고 투옥

옥에서 하느님 섭리 깨닫고 성경 통독

아내와 함께 정일우 신부에게 세례받아





서울대 문리대 1급 데모꾼

“군사독재를 막지 못하면 조국의 주인이 아닌 이방인이 될 겁니다.”

나는 동기들보다 나이가 든 탓에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해 만기제대한 후 1971년에 복학했다. 이 무렵 군사독재 정권은 교련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해 군국주의를 강화하고자 했다. 나는 교련 반대 시위의 연사로 자주 나선 탓에 문리대의 1급 데모꾼으로 낙인찍혔다.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해 서울의 10개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군인을 주둔시키는 한편, 데모 가담자들을 잡아들였다. 나 역시 수배돼 도피하다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이듬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석 달 동안 구금당했다가 무사히 풀려났지만, 곧바로 ‘문제아 길들이기’ 코스에 붙들려가 3박 4일간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그러나 억울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원망하거나 앙심을 품지도 않았다. 그간 내가 휘둘렀던 주먹다짐을 고스란히 되돌려받는 것이라 여겼다. 못된 싸움꾼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이들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1973년 3월에 복적됐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급기야 1974년 4월에 민청학련사건이 터져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제적·구속됐다. 중앙정보부로 이송돼 무자비한 구타와 잠을 재우지 않는 살인적 고문을 당했다. 일주일간 모든 것을 다 털린 후에야 구치소로 갈 수 있었다. 동지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참담함과 부끄러움에 몸부림쳤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 이름을 외우지 않게 됐다. 마침내 형이 선고되던 날, 내 목소리가 재판정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재판장님과 마찬가지로 밥 굶고 발 부르터가며 애국했는데, 왜 이 자리에 서 있는 겁니까? 제가 죽어서 나라가 잘되리라 생각하시면 사형에 처해주십시오. 기꺼이 죽겠습니다.”

파월장병 출신인 삼성장군 재판장은 내게 15년 형을 선고했다. 골목대장 날건달이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주투사로 공인된 날이었다.

 
서울대 캠퍼스에서 학우들과 시국을 논의하는 제정구(오른쪽에서 두번째).

청계천 판자촌 야학교사

나는 개신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캠퍼스에는 최루탄과 돌멩이가 교차하고 있는데, 개신교 서클은 이웃을 사랑하라며 태평스럽게 전교했다. 나는 엄중한 현실에 무감각한 개신교인들이 소인배적인 야바위꾼으로 보였다.

그러던 차에 나 대신 어머니가 경찰서에 연행돼 고초를 겪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 동생 정무가 다니던 복음교회의 장성환 목사가 많이 위로해줬다. 이후 그와 사회 현실을 토론하면서 예수쟁이에 대한 혐오가 점차 사라졌다. 그는 내게 청계천 송정동 판자촌의 활빈교회 야학교사를 권했다. 나는 그곳에서 김진홍 목사를 만나 더럽고 낮은 곳에 있는 청계천의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라고 느꼈다. 1973년 초 활빈교회로 이사한 후 그에게 세례받았다.



인생을 바꾼 정일우 신부와의 만남

그해 말, 내 일생을 바꿔놓은 일이 벌어졌다. 미국인 신부가 청계천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유창한 한국말로 자신을 정일우(John V. Daly, S.J.)라고 소개한 그는 1960년에 예수회 신학생으로 한국에 와서 3년간 실습한 후 미국으로 돌아가 1966년에 사제품을 받았다고 했다. 이듬해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서강대에서 철학을, 예수회 신학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다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한 달간 청계천 체험을 나왔다고 했다.

나는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번듯한 예수회 신부이자 대학교수가 왜 판자촌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교인의 동정심이거나 객기 정도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하느님의 섭리였던가. 당장 그가 묵을 곳이 없어 내가 기거하던 기도실에서 함께 지내야만 했다. 아홉 살 연상인 그와 마음이 통했다. 그는 사흘 뒤에 방을 얻어 나갔는데, 그때부터는 내가 그의 작은 방에 가서 함께 지내는 날이 많았다.

1974년 1월에 김 목사가 긴급조치 반대 성명서 사건으로 체포되자 불똥이 내게 튀었다. 체포조가 활빈교회에 들이닥쳤다. 나는 속옷 바람으로 답십리까지 달아나 정일우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나를 서강대 사제관에 숨겨주었다. 그때 책상 앞에 걸려있던 십자가가 눈에 띄었다. 교회에서 보던 밋밋한 모양이 아니라 실제 예수님이 매달려있는 십자가였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 벌어진 양손과 한데 모은 발에는 못이 박혔으며, 병사가 창으로 찔러서 죽음을 확인했다는 옆구리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섬뜩했다.
 
1960년대 청계전
1973년 청계천 판자촌 모습.


수형생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간 시간

며칠 뒤 사제관에서 나왔지만, 결국 석 달 뒤에 민청학련사건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15년 형을 받고 교도소에 갇혀 육체와 정신이 무기력하게 파괴돼가던 어느 날이었다. 쥐 한 마리가 화장실 홈통을 타고 내 방에 나타났다. 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뭇등걸 같던 몸이 생명체를 발견한 기쁨에 꿈틀거렸다. 불현듯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광야에서 40여 년간 떠돌던 시련, 그리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며 40일간 겪었던 고난이 선명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맞아! 하느님께서 나를 황량한 광야로 이끄신 거야. 역사 속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단련의 시간으로 말이야.’

하느님의 인도로 판자촌에 들어갔고, 감옥에 갇혔다는 확신이 들었다. 광야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날부터 성경을 통독하기 시작했다.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던 날이 하느님과 함께하는 날로 바뀌었다. 수형생활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이 됐다. 나는 1975년 2월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예수님 음성 듣고 가톨릭으로 개종

출소한 직후 정 신부의 제안으로 치악산에서 열흘간 피정했다. 허름한 여인숙의 탁자 위에 놓인 십자고상이 촛불에 빛났다. 축 늘어진 예수님 모습은 섬뜩함이 아니라 애처로움으로 다가왔다. 가련한 그의 모습이 답답하게 보였다. 나는 수석 사제나 율법학자와 같이 그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아니, 도발해 그를 움직이고 싶었다.

“당신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왜 이런 수모를 당하는 겁니까?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이 썩어빠진 세상을 뒤엎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 달란 말입니다.”

그때였다. 묵직한 음성이 방을 가득 채웠다. “나도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질 때까지 아버지께 청했다.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지.”

나는 급히 되물었다. “도대체 그 뜻이 뭔데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단 말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죄를 짓고 낙원에서 추방된 뒤 하늘 나라는 굳게 닫히고 말았다. 이제 내가 사람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가는 거야. 누구든 회개하고 나를 통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거지. 그게 바로 아버지의 뜻이란다.”

“??.”

“썩어빠진 세상을 뒤집어엎어 달라는 건 가당치 않아.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거든. 내 제자가 되려면 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거라.”

내가 가야 할 길이 환히 보였다. 내 십자가를 지고 빈손으로 따르다 하나의 밀알로 죽는 길이었다. 지난날의 과오와 죄악이 낱낱이 떠올랐다. 옛일을 하나하나 곱씹고 통렬히 뉘우치며 가슴을 쳤다. 어느새 탁자 위에는 촛농이 수북이 쌓였고, 창밖은 훤해지고 있었다.

개종을 결심했다. 전에 받은 개신교 세례는 신앙적 결단이 아니라 그곳에 동화해야겠다는 조급증 때문이었다. 더욱이 청계천의 하느님을 통해 사회운동의 성과물을 내고 싶다는 철부지 같은 생각이 앞섰다. 부끄러웠다. 1977년 1월에 아내와 함께 정 신부에게 세례받았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과 동행하며 사람의 길을 발견하리라 다짐했다. 구도자로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무엘의 말을 읊조리며?.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

 

김문태 힐라리오 (한국평단협 수석부회장, 문학박사)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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