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 교회는 올해 정기 희년을 지내며 교회 구성원 모두가 순례자가 되어 희망의 여정을 걸었다. 하지만 희년을 막 시작한 기쁨도 잠시, 지난 4월 12년간 보편 교회를 이끌며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온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느님 품으로 떠나는 슬픔도 겪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5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레오 14세 교황을 세워주셨고, 보편 교회는 다시금 새 목자와 함께 평화와 생명의 길을 걷고 있다.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라는 첫 인사로 제267대 사도좌에 오른 레오 14세 교황은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를 통한 평화의 당위성을 전 세계에 촉구하고 있다. 2025년 세계 교회를 돌아봤다.
장현민 기자 memo@cpbc.co.kr
이준태 기자 ouioui@cpbc.co.kr
한 순례자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성년 문을 손으로 만지며 기도하고 있다. OSV
2025년 희년
보편 교회는 지난해 12월 24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성년 문 개방과 함께 ‘희망의 순례자’를 주제로 2025년 희년을 보냈다. 올해 희년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선포한 2000년 대희년 이후 25년 만이다.
희년 기간 로마에서는 세계 커뮤니케이션의 희년을 시작으로 군인·경찰·예술가·자원봉사자·의료인, 주교·사제·부제·수도자, 동방 교회와 신심단체, 마리아의 영성 등 다양한 주제 행사가 열렸다. 순례자들은 로마 4대 대성전을 순례하며 다양한 문화·신심 행사에 참여하면서 희망의 여정을 걸었다. 올해 로마를 찾은 전 세계 순례자 수는 11월 기준 2920만 명에 달한다. 교황청은 희년 폐막까지 누적 3000만 명에 달하는 이가 로마를 순례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7월 29일~8월 3일 열린 젊은이의 희년은 ‘작은 세계청년대회’를 방불케 할 만큼 로마를 신앙 열정으로 달궜다. 이 기간 로마 순례자는 100만 명에 달했다. 서울대교구는 단일 교구로는 가장 많은 1078명의 순례단을 파견해 우리 젊은이들이 희년의 기쁨을 나누도록 했다. 레오 14세 교황은 8월 3일 로마 토르 베르가타에서 봉헌한 젊은이의 희년 폐막미사에서 “예수님은 영혼의 창문을 두드리며 우리에게 모험을 떠나도록 권유하고 계신다”며 응원했다. 교황은 폐막미사에서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의 본대회가 2027년 8월 3~8일 열릴 것이라고 공식 발표하며 세계 젊은이들을 한국으로 초대했다.
희년의 여정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성년 문을 닫는 내년 주님 공현 대축일(2026년 1월 4일)까지 이어진다. 교황청 복음화부 세계복음화부서 장관 직무 대행 살바토레 리노 피시켈라 대주교는 11월 ‘2025 희년위원회’ 회의에서 “희년 기간 35개의 주요 행사가 열렸고 많은 인파가 몰렸지만, 이탈리아 정부와 지방 정부 협력 덕에 순례를 이어갈 수 있었다”며 희년 여정에 함께한 모든 이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추기경단이 4월 27일 로마 성모 마리아 대성전 내 프란치스코 교황의 무덤을 찾아 기도하고 있다. OSV
한 여성이 4월 21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을 보도한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를 품에 안고 고인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OSV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형제자매 여러분, 행복한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2025년 4월 20일, 희년 중에 맞은 주님 부활 대축일 당일. 한 달이 넘는 장기 입원 치료를 마친 후 다시 바티칸으로 돌아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전 중앙 발코니에서 ‘로마와 온 세상(Urbi et Orbi)’에 전하는 사도좌 부활 축복 메시지를 전했다. 이후 교황은 광장에 내려와 전용 차량을 타고 5만여 명의 신자들을 마주하며 한참이나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마지막 인사가 됐다. 이튿날인 4월 21일 오전 7시 35분, 전 세계 신자들은 지구촌 인류 전체가 주님 뜻에 따라 서로 사랑하길 그토록 원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상 순례를 마치고 하느님 품에 든 큰 슬픔을 마주했다.
모든 이웃을 사랑하는 데 헌신한 교황은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 지구촌 인류를 넓은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하느님의 종들의 종’으로서 모든 하느님 백성과 12년간 사랑으로 소통했다. 교황은 12년 1개월 8일의 재위 동안 47차례에 걸쳐 우리나라를 비롯한 68개국을 사목방문했으며, 선종 직전까지 교도소를 방문한 모두의 벗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지막 사도좌 부활 축복 메시지에서 “평화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다시금 되새기자”며 “거룩한 주님의 무덤, 즉 부활의 교회에서 나온 평화의 빛이 모든 성지와 전 세계에 퍼지길 바란다”면서 마지막까지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제267대 레오 14세 교황이 8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중앙 발코니에 서서 신자들을 축복하고 있다. 교황은 신자들에게 전하는 첫 인사말을 통해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La pace sia con tutti voi)”라고 전하며 모든 민족과 온 세상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도했다. OSV
레오 14세 교황 선출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5월 8일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느님께서 새 교황 레오 14세를 보내주심을 세계에 알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레오 14세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전 중앙 발코니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가톨릭교회 역사상 최초의 미국인 교황이자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출신 첫 교황이다.
이날 교황은 ‘로마와 온 세상’(Urbi et Orbi)에 보내는 첫 강복을 통해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보편 교회를 이끌어갈 자신의 사목 비전을 밝히면서 ‘평화’를 12차례 언급했다. 광장을 메운 신자들은 교황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며 새 교황의 탄생을 축하했다.
이에 앞서서는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이후 추기경단이 2주가 넘는 ‘사도좌 공석’(Sede vacante) 상태에서 교황을 애도하고, 급박한 상황 속에 기도와 여러 차례 회의로 콘클라베를 준비했다. 교황 투표권을 지닌 133명의 추기경단은 교황 선종 후 11차례에 걸친 총회를 통해 교황이 남긴 유산을 이어갈 방안을 논의했고, 콘클라베 개회 후 4차례 투표 끝에 새 교황을 뽑아세웠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 추기경은 1978년 8·10월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한국인 추기경으로는 두 번째로 콘클라베에 참여했다.
레오 14세 교황이 10월 27일 교황 교서 「희망의 새로운 지도 그리기」에 서명한 후 교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OSV
교황청 신앙교리부 장관 빅토르 마누엘 페르난데스 추기경이 4일 로마 예수회 본부에서 공지 「충실한 백성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를 발표하고 있다. OSV
교회 가르침 전한 다양한 문헌들
레오 14세 교황은 즉위 후 여러 문헌을 반포하며 교회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10월 9일에는 즉위 후 첫 교황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를 반포했다. 교황은 권고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님 부르심에 응답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 안에서 ‘주님의 모습’을 찾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신앙인이 될 것을 촉구했다.
교황은 10월 28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 「교육의 중대성」 반포 60주년을 기념해 교황 교서 「희망의 새로운 지도 그리기」(Disegnare nuove mappe di speranza)를 반포했다. 교황은 「교육의 중대성」을 통해 이룬 ‘교회의 풍요로운 교육의 역사’를 기념하면서 급격한 기술 발전과 복잡하고 파편화되어가는 교육 환경 변화에 맞서 가톨릭 교육이 “새롭게 희망의 지도를 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11월 23일 교황 교서 「신앙의 일치 안에서」(In Unitate Fidei)를 반포하고,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통한 교회 일치를 재확인했다.
올해 가장 주목받은 교황청 문헌은 성모 마리아의 ‘공동 구속자’(co-redemptrix)’ 호칭에 대한 교회 입장을 정리한 공지 「충실한 백성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였다. 가톨릭교회는 교황청 신앙교리부가 11월 4일 발표한 이 공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속자이심을 천명했다.
공지를 통해 10세기경부터 시작된 성모 마리아의 ‘공동 구속자’ 지위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게 됐다. 교황청은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계시는 이들 가운데 가장 으뜸이신 분”으로 “전구를 통해 주님의 자비를 상징하는 어머니의 표징”이라고 밝혔다.
레오 14세 교황(가운데)이 1700년 전인 325년 첫 보편 공의회가 열린 니테카(튀르키예 이즈니크) 성 네오피토 대성전 유적지에서 정교회 바르톨로메오 1세 세계총대주교(오른쪽)를 비롯한 여러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교회 일지 기도를 바치고 있다.OSV
교황 첫 해외 사목방문
레오 14세 교황은 즉위 후 첫 해외 사목 방문으로 11월 27일~12월 2일 튀르키예와 레바논을 찾아 종교 간 대화와 교회 일치를 통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교황은 이 기간 교회 역사상 첫 보편 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 1700주년을 기념해 정교회 감사의 성찬 예배에 참여했고, 바르톨로메오 1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 등 여러 교회 지도자들과 이즈니크(옛 니케아)를 찾아 함께 기도를 바쳤다.
교황과 세계총대주교는 공동 선언을 통해 앞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날 주님 부활 대축일을 기념하기를 희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2000주년이 되는 2033년 성지 예루살렘에서 ‘특별 희년’을 함께 기념하자고 초대했다.
교황은 “우리는 성령의 인도 아래 서로 사랑하고 대화하면서 여전히 존재하는 분열의 악한 표양을 극복해야 한다”며 “우리가 더 화해할수록 공동체와 국가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인 평화와 형제애의 메시지이자 모든 이에게 희망을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믿음직스럽게 증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교황은 이어진 레바논 방문에서도 “대화만이 길”이라며 어지러운 국제 정세에 평화와 안정이 깃들길 희망했다. 교황은 수도 베이루트에서 15만 명의 신자와 젊은이들에게 “여러분은 물려받은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며 위로와 희망을 전했다.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피에르 바티스타 피자발라 추기경이 7월 18일 팔레스타인 가자 시티 성 가족성당에서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을 위로하고 있다.OSV
평화를 향한 교회 노력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등 희년 중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분쟁이 계속됐다. 교회는 어둠 속에 홀로 등불을 밝히며 평화를 위한 기도를 이어갔다.
레오 14세 교황은 즉위 직후부터 연말까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세 차례나 만나 보편 교회의 평화 중재 의지를 피력했고, 교황청을 평화 회담의 장소로 제공하겠다고도 제안했다. 우크라이나 납치 아동 송환과 가자지구 포로 교환 등 성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교회는 때마다 국제사회의 군비 경쟁에 경종을 울렸다. 유엔 주재 교황청 상임 옵서버 가브리엘 카치아 대주교는 “국제사회는 인간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법을 준수하라”고 촉구했다. 교황 역시 일본 원폭투하 80주년 메시지를 통해 “각국의 방어수단 확보가 ‘군비 경쟁의 구실’이 돼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교회는 평화를 향한 희망을 계속 키워가고 있다. 전장의 한복판 이스라엘 예루살렘과 우크라이나 키이우 교회에서 희년의 기쁨을 나눴고, 희년 십자가를 들고 행진했다.
레오 14세 교황 주례로 9월 7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 복자 피에르 조르지오 프라사티의 시성식 중 한 신자가 아쿠티스 초상화를 들어보이고 있다. OSV
밀레니엄 세대 첫 성인 탄생
밀레니얼 세대 첫 성인도 탄생했다. ‘하느님의 인플루언서’ 카를로 아쿠티스(1991~2006)가 9월 7일 레오 14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것이다. 교황은 이날 아쿠티스 성인과 함께 이탈리아 평신도 피에르 조르지오 프라사티(1901~1925)를 시성하며 “20세기 초의 젊은이와 우리 시대의 청소년이었던 두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던 이들었다”면서 이들을 닮은 복음의 증거자가 되길 독려했다.
젊은 두 성인의 탄생에 전 세계가 열광했다. 전 세계 신자들은 특히 이웃집 친구같은 매력을 지닌 ‘또래 사도’ 아쿠티스 성인을 향해 뜨거운 관심을 보내고 있다. 이탈리아 아시시에 안장된 그의 무덤에는 지난해에만 100만 명에 달하는 순례자가 다녀간 것으로 알려진다.
레오 14세 교황이 6월 26일 바티칸에서 열린 시노드 사무처 제16차 정례평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다.OSV
시노드 여정 지속? 연구 그룹 최종보고서 연말 공개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선교하는 교회를 향한 여정은 올해도 계속 이어졌다. 레오 14세 교황은 6월 교황청 시노드 사무처 제16차 정례평의회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긴 시노드 정신을 계승해 여정을 이어가겠다고 천명했다.
교황청 시노드 사무처는 곧이어 시노드 이행 단계에서 각 지역 교회에 구체적 지침을 제시한 문헌 「시노드 이행 단계 지침」을 발표했다. 시노드 이행 단계에서 지역 교회들이 시노드 사무처에 전해온 질문들에 대해 구체적 답변을 전하고, 교회 전체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시노드 여정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역 교회들은 지침에 따라 시노드 이행 과정 점검을 목표로 2028년 10월 열릴 교회회의(Ecclesial Assembly)를 향한 여정을 함께 걷고 있다.
연말에는 곧 여성 부제·사제 양성 방향 등 교회 내 중요한 현안에 관해 연구해온 시노드 그룹들의 ‘최종 보고서’ 발표가 남아 있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3월 디지털 환경에서의 선교, 여성의 교회 내 역할 확대 등 논의가 필요한 주제를 계속 연구할 것을 지시하면서 진행된 것이다. 최종 보고는 12월 31일로 예정돼 있지만 ‘여성 부제직에 관한 연구위원회’ 등 일부 그룹은 종합 보고서를 이미 공개했다. 교황청은 여성 부제에 반대 의견을 표명하면서도 이 문제에 대한 추가적인 신학·사목적 연구를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