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 19장 그리스어 원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Κα? ε?δον(그리고 나는 보았다).” 이 문장은 단순한 시각적 보고가 아니다. 성경에서 ‘본다’는 것은 사태의 겉모습을 목격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 안으로 들어가는 사건에 가깝다. 원문에서 이어지는 말,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 역시 이야기의 웅장함이나 신비감을 덧붙이기 위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실을 해석해 오던 관점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게 되었음을 알리는 신학적 신호다. 요컨대, ‘열린 하늘’은 우리의 눈을 하늘의 눈, 곧 하느님의 뜻을 비추는 자리로 옮겨 놓는다.
에제키엘이 유배의 절망 한가운데서 “하늘이 열리면서 나는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시를 보았다”(에제 1,1)라고 증언했듯, 요한도 로마 제국의 화려함과 사치, 그 압도적인 질서의 한복판에서 하늘이 열리는 장면을 본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더 이상 제국의 계산과 힘의 논리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선언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뜻으로 역사를 새롭게 읽겠다는 신앙의 결기이자 조용한 외침이다.
그 열린 하늘 아래, 백마를 탄 이가 나타난다. 백마는 고대 세계에서 전장의 승리를 상징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의 승리는 누군가를 꺾고 나서 차지하는 전리품 같은 것이 아니다. 이 백마는 비교우위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달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백마는, 하느님 앞에서의 승리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기 위해 등장한다.
요한 묵시록에서 반복되는 ‘흰색’은 단순한 순결의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구원과 인정의 색이다. 흰 말과 흰 옷은 상처를 딛고 견뎌 온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선언하는 하느님의 위로다. 그러므로 백마는, 우리 삶이 어떤 모양으로 흔들리든, 하느님께서 끝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그분의 성실함 자체를 상징한다.
그래서 백마를 탄 이는 “성실하시고 참되신 분”(묵시 19,11)이라 불린다. 성실함은 감정의 온기가 아니라 약속의 무게다. 하느님은 역사를 시작하신 분일 뿐 아니라, 그 끝을 책임지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정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묵시 19,11)이시다. 여기서 싸움은 칼과 창이 맞부딪히는 전투가 아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싸움은 언제나 억눌린 이들을 위한 심판의 자리였다.
시편은 이를 이렇게 노래한다. “그분께서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성실하게 다스리시리라.”(시편 96,13) 이사야 예언자 역시 메시아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이사 11,4)라고 그린다. 따라서 요한 묵시록의 심판은 파괴나 단죄의 잔혹함이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던 구원의 외침이 마침내 역사 위로 터져 나오는 사건이며, 진실이 더 이상 밀려나지 않는 순간이다.
이제 요한은 백마 탄 이의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묘사한다. 그의 옷은 피에 젖어 있고, 그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칼이 나온다. 이 장면은 자칫 모순처럼 보인다. 날카로운 칼이 심판의 도구이고 백마 탄 이가 승리를 상징한다면, 왜 그의 옷은 피에 젖어 있는가. 피에 젖은 옷은 승리와는 무관한 패배의 흔적이 아닌가.
그러나 요한 묵시록은 이 모순된 두 이미지를 구약 예언 전통 안에서 일관되게 연결한다. 먼저, 입에서 나오는 칼은 물리적 무기가 아니다. 이는 이사야가 말한 “입에서 나오는 막대 …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이사 11,4 참조), 곧 하느님의 말씀에 의한 심판을 가리키는 상징들과 상응한다. 악은 무력 충돌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빛 앞에서 제 힘을 잃는다.
그렇다면 피에 젖은 옷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이미지는 이사야서 63장의 심판자 환시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다.(이사 63,1?3 참조) 그곳에서 피는 무차별적 학살의 흔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가 실제 역사 안에서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는 상징이다. 말하자면, 말씀의 심판은 공허한 선언으로 끝나지 않고, 억압과 폭력을 낳은 악의 체계를 반드시 무너뜨리는 사건이라는 선언이다.
피는 폭력의 흔적이 아니라, 정의가 지연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래서 백마 탄 이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묵시 19,13)이다. 지혜서 18장 15절에 ‘말씀’이 ‘전사’처럼 단호한 심판의 형상으로 등장하듯, 하느님은 말씀으로 심판하시고, 말씀으로 현실을 바꾸신다. 말씀은 승리의 선언이 아니라 승리 그 자체다.
백마 탄 이를 따르는 하늘의 군대 또한 흰 말과 흰 아마포를 입고 있다. 이는 그들이 전투에 가담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지켜 온 증언의 삶, 침묵 속에서 견뎌 온 신앙의 시간이 하느님 앞에서 옳았음이 선포되는 순간을 뜻한다. 신앙은 세상을 이기는 기술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끝까지 진리를 놓지 않는 인내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어떤 순간에도 지지 않는다는 믿음과 그 진리를 끝내 포기하지 않은 자가 흰 말과 흰 아마포를 입고 ‘하느님의 말씀’이신 백마 탄 이와 함께할 자격을 얻는다.
이제 천사는 새들에게 “하느님의 큰 잔치”(묵시 19,17)로 오라고 외친다. 이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묵시 19,9)와 분명히 대비된다. 하나는 구원의 식탁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의 식탁이다. 에제키엘이 곡과 마곡의 패배를 새들의 잔치로 예언했듯(에제 39,17?20 참조), 요한 묵시록은 악의 종말이 상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되돌릴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붙잡히고, 그 추종자들은 말씀의 심판 앞에서 무너진다.
요한 묵시록 19장의 환시는 심판의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냉정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말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가. 힘의 언어인가, 아니면 진실의 언어인가. 백마를 탄 이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성실한 약속을 되새기게 한다. 요컨대, 진리가 사라지고 혐오와 비난의 언어가 광기의 춤을 추는 시대에도, 하느님의 말씀은 끝내 현실을 심판하고 바로잡는다는 것.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 논리 속 처세의 기술이나 변호가 아니라, 신앙 증언의 성실함이다. 진리를 위해 조용히 견디는 우리의 하루 속에서, 백마 탄 이의 승리는 이미 실현되고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 그동안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을 집필해 주신 박병규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