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주제로 연재를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글을 쓰고 있다. 2025년 한해 격주로 총 25회에 걸쳐 사막 교부의 가르침을 소개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21세기 한국을 떠나 4세기 이집트로 시공 여행을 한 셈이다. 연재를 시작하며 언급했듯이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나온 가르침이라 낯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복음에 투신한 그들 삶에서 나온 지혜는 시공을 초월한다는 사실도 감지했을 것이다.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문제는 고대든 현대든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들이 겪고 극복하고자 했던 문제는 곧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막 교부의 가르침은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살아가기 위한 삶의 구체적 지침과도 같다. 고요와 고독, 침묵, 정주, 경청, 겸손, 깨어 있음, 마음 돌봄, 마음 개방, 악습과의 싸움, 끊임없는 기도, 덕을 쌓음, 애덕 실천, 포기,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함, 탄식, 하느님 자비에 대한 희망, 삶을 통한 가르침, 본질과 핵심을 향함, 죽음을 기억함, 지금 여기에 충실함, 부단한 진보는 모두 그들 가르침의 핵심 주제로서 내적 생활을 이루는 구체적 내용이라 하겠다.
사막 교부에 관한 문헌이나 그들의 작품은 모두 ‘내적 생활(영성 생활)의 진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가 어떻게 내적 생활에서 나아갈 수 있는가?’ 이것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들이 가르치는 내적 생활은 수행과 관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은 하느님과 씨름하여 이겨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창세 32,25-31 참조).
교부들은 이 두 이름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수행과 관상이라는 내적 생활의 두 측면에 적용하고 있다. 즉 하느님과 씨름한 ‘야곱’은 수행자에, 마침내 하느님을 본 ‘이스라엘’은 관상가에 비유한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내적 생활은 수행을 통해 관상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사막 교부들의 모든 가르침 시공을 초월해 전해지는 지혜
그리스도의 참 제자 되기 위한 영성 생활의 구체적 지침 담아
늘 하느님 향하는 순례자로서 사랑 증거하며 희망 전해야
수행이란 무엇인가? 수행이란 거창하고 요란한 무엇이 아니다. 자기 절제(금욕)를 통해 욕망을 다스리고, 악습을 제거하여 덕을 쌓으며(수덕)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순수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청정한 마음과 평정심은 순수한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궁극 목표로 삼는 관상으로 들어가는 토대와도 같다.
이런 의미에서 수행과 관상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함께 연결되어 있다. 수행은 관상으로 나아가는 토대고, 관상은 수행의 궁극 목표라 하겠다. 따라서 수행 없는 관상은 공허하고 관상 없는 수행도 무의미하다. 우리 삶에서 이 둘은 늘 함께 가야 한다. 부단한 자기 정화를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 매진하는 그리스도인은 수행자이자 동시에 관상가다.
수행은 자기 자신과의 내적 투쟁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원죄로 인해 손상된 거짓 자아, 곧 에고와의 치열하고 힘겨운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에고는 온갖 탐욕과 이기심에 휘둘리기에,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누구도 하느님을 향한 내적 생활에 나아갈 수 없다. 이 싸움에는 자연히 수고와 땀이 수반된다. 그래서 힘든 것이다. 우리는 나름의 절제와 금욕을 통해 욕망을 다스리고 악습에서 벗어나려 노력한다. 하지만 매번 실패를 경험하곤 한다. 그러고선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하곤 한다.
아마도 이 과정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이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우리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한계와 나약함을 지닌, 즉 채워져야 할 여백이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고)과의 싸움은 우리 의지와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느님의 도움, 그분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한 싸움이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 온전히 완덕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한다.(규정집 12,14,1 참조) 실패와 넘어짐을 통해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체험할 때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고 하느님을 향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물을 바라보다가 물을 통해 배운 가르침을 ‘물의 지혜’란 제목으로 정리해 둔 글이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물은 자기가 없으면서 존재한다. 어떤 틀과 색깔을 주장하지 않는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 물은 모든 것을 품고 모든 것을 수용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결코 자기를 잃는 일이 없다. / 물은 아래로 흐른다. 결코 위를 향하지 않는다. 물은 가는 곳마다 생명을 움트게 하고 모든 더러움을 정화한다. / 물은 무아유존(無我有存)의 지혜를 가르쳐준다. 없어짐으로써 존재하고, 내려감으로써 올라가고. 그 어떤 장소나 환경에도 적응하고, 그 누구와도 어우러질 수 있는, 하지만 절대 자기 본질과 중심을 잃지 않는 지혜다. / 일찍이 노자(老子)는 도(道)를 물에 비유한 바 있다. 물의 교훈은 수행의 정도를 가늠하게 한다. 수행의 완성은 바로 물의 경지가 아닐까 한다. 이 경지는 자기가 죽을 때 비로소 도달 가능할 것이다.”
수행을 통해 에고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물과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지는 스스로 내려감으로써 올라가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줌으로써 얻게 되는 경지다. 이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역설의 길, 바보의 길인 사랑의 길이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에게 내려오셨고, 당신 생명을 온전히 내어주셨다. 내적 생활에 나아감은 결국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곧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1요한 4,8 참조) 이런 의미에서 관상가는 바로 하느님 사랑에 잠긴 사람이다.
올해 희년 주제는 ‘희망의 순례자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복된 희망을 품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이다. 온갖 탐욕과 이기심에서 벗어난, 맑고 청정한 수행자, 늘 하느님을 갈망하고 그분만을 찾는 관상가가 될 때 우리는 참된 희망의 순례자가 될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하는 순례자는 세상에 사랑을 증거하고 사람들을 사랑의 길로 이끌 것이다. 불목과 갈등, 미움과 증오의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희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 그동안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를 집필해 주신 허성석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