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은 곳 구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내려오신 자리, 이곳은 성가정이 탄생한 곳이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맞이했듯, 30년 넘게 본당 구유를 만들어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을 모신 이들이 있다. 서울대교구 연희동본당 매리지 엔카운터(대표부부 김호진 아브라함·조란숙 율리아나, Marriage Encounter, ME) 부부들이다.
성당 마당에 내린 별
서울 연희동성당을 오르는 언덕길.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별 모양 조명이다. 마당에 들어서면 그 별빛 아래 삼각형 모양의 구조물이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예뻐요!”, “멋있어요!”
미사 참례를 위해 모인 주일학교 아이들이 구유를 둘러싸고 설렘 가득 담아 감탄을 쏟아냈다. 신자들도 “예쁜 구유를 보니 아기 예수님이 계신 모습이 더 기다려지는 것 같다”며 사진을 찍고, 또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자세히 보니 일반적인 구유와는 느낌이 달랐다. 전체적으로 삼각형 형태에 양옆으로 뻗은 처마의 모습이 삼각형 두 개를 포갠 ‘다윗의 별’ 윗부분처럼 보였다. 구유 위로 빛나는 별 모양 조명에서 구유까지 이어지는 모습이 꼭 하늘에서 내려온 별이 땅에 내려앉은 듯한 느낌이다. 반짝이는 별의 한가운데에 밝은 조명 속에 성모상과 성요셉상, 그리고 아기 예수상이 놓여있었다.
흔히 초가지붕의 동양적 마구간 구유를 떠올리곤 하지만, 사실 베들레헴의 주님 탄생 성당에서 알 수 있듯 구유는 동굴에 가깝다. 하지만 올해 본당이 재해석한 구유는 ‘현대적인 구유’다. 나무, 지푸라기 등 한국의 전통적인 재료가 ‘여기’를 드러낸다면,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지금’을 담았다.
외형은 단조롭지만 지붕과 테두리, 벽면 등에 나무를 덧대 입체감을 더했다. 구유 내부도 조형미를 살렸을 뿐 아니라 간접조명 등으로 분위기를 잡았다. 페인트칠은 워싱 기법을 활용해 눈을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흰색을 표현했다. 형태적으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의 모습을, 동시에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삼각형으로 기획됐다. 마구간이라기보다 현대적인 설치미술 느낌이다.
성가정의 탄생 꾸미는 부부들
이렇듯 구유에 정성이 가득한 이유는 ME 부부들이 대대로 구유를 꾸며 오며 쌓은 노하우 덕분이다. 무엇보다 부부의 일치를 통해 성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ME의 영성이 구유에 담겼다.
성가정이 탄생한 자리 구유. 마리아와 요셉이 함께 아기 예수가 탄생할 자리를 마련했듯, 본당의 구유를 만드는 일에도 늘 부부가 함께해왔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조금 위축되기는 했지만, 구유를 만드는 날은 늘 잔치 같았다.
김호진·조란숙 부부는 “구유를 만드는 날이면 자매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형제들은 일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가정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이 됐다”면서 “너무 잔치처럼 신나게 구유를 만들어서 다른 신자들이 부러워했을 정도”라고 구유 준비 과정을 회상했다.
구유를 위해 부부가 협력했고 부부와 부부, 가정과 가정이 힘을 모았다. 그러는 중에 서로에게 경청을 배웠고, 완성되는 구유를 보면서 공동체 안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있었다.
올해 구유 제작을 주도한 엄경용(미카엘) 씨는 “처음에는 대략적인 콘셉트만 잡았는데, 중간에 서로 의견을 내고 함께하면서 일이 척척 맞아가면서 더 풍성하게 구유를 완성할 수 있었다”면서 “갈등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결국 공동체가 화합하고 함께 나아가는 은총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기다림을 나누다
30년이란 세월 속에 본당 ME에 여러 성당 건축을 맡은 건축가나 인테리어 전문가, 목수 등 각계 전문가들도 함께하면서 구유의 완성도가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전문적’인 구유를 만드는 것이 목표는 아니었다.
본당 ME 회원으로 구유 작업에 함께해온 건축가 임근배(야고보) 씨는 “전문가들은 며칠이면 만들 수 있겠지만, 우리는 며칠 만에 만들어서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한 달 정도의 기간을 두고 만들어간다”면서 “ME 식구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 기다림이라는 영성을 나눈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달 남짓 설치될 구유를 위해 한 달가량을 평일 퇴근 후나 주말에 모여 구유를 만들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 기다림은 본당 공동체에게도 전해졌다.
특별히 올해는 대림 제1주일인 11월 30일 교중미사 후 구유 축복식을 열었다. 그동안 축복식은 성탄을 앞두고 간단하게 진행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본당 주임 최장민(도미니코) 신부, 부주임 백종원(마르코) 신부, 보좌 최원영(스테파노) 신부가 공동으로 집전하며 본당 공동체가 함께하는 축복식으로 마련했다.
최장민 신부는 “구유는 한 번에 완성되지 않고 대림시기를 거치면서 동물들, 성모님과 요셉 성인, 예수님, 그리고 동방박사에 이르기까지 전례 시기 안에서 하나하나 채워져 간다”면서 “구유의 이런 기다림을 본당 신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축복식을 성대하게 준비했다”고 말했다.
아기 예수상을 구유에 모신 ME 부부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용히 기도했다. 별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듯한 구유에 아기 예수상을 모신 것처럼, 온 땅의 모든 가정에 별빛 같은 아기 예수님의, 성가정의 축복이 내리길 바라는 마음이, 구유를 바라보는 부부들의 눈빛에 묻어나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