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교구장 정신철(요한 세례자) 주교는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루카 2,7) 제목의 2025년 주님 성탄 대축일 메시지를 발표했다.
정 주교는 메시지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포기하는 비움(Kenosis)으로 인간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했다. 정 주교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다”며 “이 사랑을 이제 우리의 삶 안에서 실천항 차례”라고 말했다.
정 주교는 한국의 높아진 세계적 위상 이면으로 끊이지 않는 분쟁, 대화 없이 대립으로만 치닫는 갈등, 이기주의 등 슬픈 사회적 현실을 언급하며,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물론 사회적 분열과 계층 구분으로 사회가 더욱 양분화하는 양상”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그 옛날 아기 예수님이 탄생할 자리가 없었듯, 지금의 세상도 하느님의 사랑이 머무를 자리가 없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환대’의 영성 실천을 강조한 정 주교는 “주님 성탄으로 세상에 빛이 들어왔으며, 그 빛은 닫힌 마음을 열고 굳어진 생각을 녹이는 사랑의 빛”이라며 “인간을 사랑하시어 모든 것을 버리시고 자신을 비우신 하느님처럼 우리도 가진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 빛을 알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환대는 ‘마음을 여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마음의 문을 열어 하느님을 만나며, 사회의 어렵고 힘든 이웃들과 마음을 나누는 한 해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다음은메시지 전문.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루카 2,7)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구세주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성탄은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안에 가장 온전히 드러난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당신의 영광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은 이러한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이제까지 느낄 수 없었던 구원의 빛이 내뿜는 사랑의 강렬함을 실감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를 두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이사 9,1) 예언자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온 구원의 빛을 이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성탄의 위대한 사랑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되시기까지, 자신을 남김없이 비워낸 하느님의 사랑은 이를 통해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457-458항 참조)
이 거룩한 날, 사도 바오로의 신앙고백을 더 깊이 묵상해 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하느님의 사랑에는 강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고 포기하는 비움(Kenosis)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인간의 처지가 되시고,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모두 비워 우리를 위해 남김없이 내어주신 강생을 통해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이 사랑을 이제 우리의 삶 안에서 실천할 차례입니다. 하느님의 자기 비움을 깨달은 우리라면 자신만의 생각과 행동을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없습니다. 강요는 통교를 가로막고 결국에는 사랑도 가로막습니다. 사랑은 소통과 친교 위에 이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탄생 직전, 요셉 성인과 성모님은 해산할 집을 찾아 헤맸지만, 그 누구도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기심과 불통으로 가득 찬 세상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7)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실을 마주합니다. 세계적 위상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우리나라는 어느새 외국인들이 방문하고 싶어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높아진 위상 이면에는 또 다른 슬픔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끊이지 않는 분쟁, 대화와 타협 없이 대립으로만 치닫는 갈등, 단체와 정당 등 개인을 넘어 사회 전반에 자리 잡은 이기주의에 모두 지쳐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공동선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니, 공동선 자체에 무관심한 듯해 더욱 안타깝습니다. 나아가 경제적 풍요의 이면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물론 사회적 분열과 계층 구분으로 사회가 더욱 양분화되는 양상입니다. 빛보다는 어두움이 짙게 드리운 것 같습니다. 그 옛날 아기 예수님이 탄생할 자리가 없었듯, 지금의 세상도 하느님의 사랑이 머무를 자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 성탄으로 세상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 빛은 닫힌 마음을 열고 굳어진 생각을 녹이는 사랑의 빛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사랑하시어 모든 것을 버리시고 자신을 비우신 하느님처럼 우리도 가진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 빛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이기심을 내려놓고, 자신만을 향하던 우리의 시선을 이웃에게 돌립시다. 우리 안에 주님께서 들어오실 자리를 마련합시다.
특별히 우리 교구는 2027년 세계 청년대회를 준비하며 ‘환대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환대는 ‘마음을 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하느님을 만나며, 사회의 어렵고 힘든 이웃들과 마음을 나누는 한 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그리스도 탄생의 기쁨과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구원의 빛 안에서 충만한 은총의 시간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2025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인천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박주현 기자 ogoy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