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50주년을 맞은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이하 복지회)는 1월 23일부터 서울 명동 갤러리1898에서 장애 미술작가들의 특별전시회 ‘사랑, 더 큰 희망이 되다’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작가들의 독창적인 사유와 감정을 담은 작품을 통해 ‘장애’라는 고정관념을 넘고, 예술을 통한 사회화와 연대를 응원하는 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전시에 참여하는 복지회 산하 서울 서초구립 한우리정보문화센터(이하 한우리) ‘미술창작소’ 작업 현장에서, 새해의 희망찬 빛이 장애의 벽 너머까지 조용히 스며드는 순간들을 미리 만날 수 있었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면의 감정과 사유를, 고유한 감각과 상상력으로 펼쳐내는 작가들의 예술혼은 어떤 한계도 가로막을 수 없었다.
내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
“비가 왔는지 벽에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어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속에 번졌고 ‘벽이 울고 있구나’라는 이미지가 떠올랐죠. ‘그러면 이 눈물의 근원지가 어디일까….’ 실마리를 풀어가듯 작업에 들어갔어요.”
12월 10일 미술창작소에서 만난 서주현 작가는 작품 <The Origin of Tears(눈물의 근원)>를 완성 중이었다. 그는 작품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각각 연보라와 옅은 청색 물감을 덮은 두 이젤 위에 가는 붓으로 한 획 한 획 물방울의 궤적을 새기고 있었다.
2025년 5월 미술창작소 입주 작가로 선정된 서 작가는 자신만의 작업 공간에서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10살에 지체 장애를 입은 그는 장애가 없던 어린 시절부터 화가의 꿈을 키웠다.
긴 시간 재가 장애인으로 지내던 서 작가에게 그림은 삶의 원동력이었고,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창구였다. 그렇게 미술대학까지 졸업한 서 작가는 재료와 작업실 비용 등 현실적인 벽에 가로막혀 20년 넘게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궁극의 목표는 여느 예술가와 다르지 않아요.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거죠.”
전에는 바다, 공주님의 방 등을 그리며 현실의 결핍을 그림으로 풀어왔던 서 작가는 “이제는 인간 본연의 감정에 대해 다루고 싶다”며 물줄기마다 농담(濃淡)을 달리해 작업에 임했다.
이미 벽을 훑고 지나간 물의 궤적은 말라가는 눈물자국처럼 옅게, 막 흐르는 물방울의 자취는 방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방울같이 짙게…. 서 작가 고유의 작품 세계인 처연(凄然)한 미감이, 섬세한 붓놀림으로 숨결을 입고 있었다.
“불안과 분노로 넘치는 우리 사회에서, 우울과 불안 등 여러 감정에 힘겨워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위로를 줄 수 있는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요.”
자신(自身)을 표현하다, 자신(自信)이 싹트다
미술은 서 작가를 비롯한 장애 미술인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사회와 관계를 맺는 하나의 생활 방식이 되고 있다. 말로 다 하기 어려운 감정과 생각을 색과 선, 이미지로 풀어내 진정한 자신을 찾고, 사람들과 나누며, 또 그 과정 자체를 기쁨으로 느끼고 있다.
예술 활동은 직업 재활로도 이어진다. 작가들은 실제로 작업하고, 전시하며, 작품을 판매하는 활동을 통해 예술가이자 직업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키워가고 있다.
“그림을 그릴 때도, 전시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할 때도, 직업인으로 인정받을 때도 행복해요. 더는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자랑스러워요.”
박세준 작가가 전시작 <커피콩 위의 카페사자>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알록달록하고 환상적인 배경에 명랑하고 강렬한 동물들을 그리는 그의 작품에는 동물에 대한 애정과 순수한 기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가치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자폐성 장애를 지닌 박 작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지적장애인 사생대회에서 사자 그림으로 대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미술인의 길에 들어섰다. 자폐성 장애인은 언어적 표현이 어렵고, 반복적인 것에서 안정을 찾기에 변화를 힘겨워하는 등 예술 활동에 어려움이 따른다.
그의 잠재력은 역량 강화 교육, 근로 미술작가 작업 지원 등 물심양면 힘을 보태온 한우리의 동반으로 꽃필 수 있었다. 색연필과 종이만 쓰던 과거와 달리 마커, 아크릴 물감, 캔버스, 마블링 등 다양한 화구와 기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등 두려움을 이기고 새로운 도전을 이어올 수 있었다.
박 작가는 실제 전업 작가가 되어 활발히 활동하는 장애 예술인 중 하나다. 2024년 제4회 스타벅스 그림 공모전에 출품한 <카페 사자와 친구들>은 235건의 심사 작품 중 금상 수상작으로 뽑혀 협업 굿즈도 출시됐다.
“미술은 내가 무엇을 느끼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박 작가는 앞서 ‘행복을 담아서’를 제목으로 네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자유롭고 행복했기에, 그 행복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라고.
“마음이 마음에게 행복을 전하는 ‘행복한 화가’가 되고 싶습니다. 장애가 있어도, 혹은 다른 문제가 있어도 우리 모두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이재용(바오로) 한우리 관장은 “장애 미술작가들의 작업은 그들 각자가 통찰하고 경험해 온 삶과 경험, 재능을 바탕으로 세상에 이야기를 건네는 ‘예술 언어’”라고 말했다. 이어 다가올 전시에 대해 “그 언어로 그들이 사랑과 희망처럼 보이지 않는 가치마저 얼마나 충만하고 독창적으로 표현해 내는지 모두를 감탄하게 하고, 장애·비장애의 경계를 초월한 이해와 연대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서초구립 한우리정보문화센터는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가 수탁 운영하는 장애인 종합복지관으로, 2009년 11월 개관 이래 ‘장애가 장애가 되지 않는 세상 구현’을 모토로 다양한 장애 유형의 이용인을 동반하고 있다.
2016년부터는 문화예술 특화 복지관으로 방향을 잡아 미술창작소와 ‘갤러리 활(活)’을 운영해 왔다. 또 예술 활동이 장애 당사자의 직업생활과 수입으로도 이어질 수 있도록 미술창작소를 중심으로 근로 미술작가 매니지먼트, 전시와 작품 판매, 아트상품 제작 등을 하고 있다. 예술 직무로 취업을 희망하는 당사자는 기업체 소속 작가나 센터 소속 문화예술 일자리로 취업도 지원한다.
‘사랑, 더 큰 희망이 되다’
‘마음속 사랑이 작품을 통해 세상과 나누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의미를 담은 이번 특별전시회는 복지회 설립 50주년 기념을 넘어 장애 미술작가들의 재능을 사회와 공유하고, 나눔과 연대를 통한 더 나은 공동체의 미래를 모색하는 자리로 기획됐다. 회화, 일러스트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전시될 예정이며, 일부는 관람객에게 판매돼 작가들의 창작활동과 자립을 응원하는 데 사용된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장 정진호(베드로) 신부는 “사랑이 모이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용기가 된다”며 “전시회가 그 희망의 연결점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