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가」를 펼치면 ‘하이든’과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반가움에 유심히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이 아니라, 동생 요한 미하엘이다. 실제로 27·32·78·167번 성가는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이며, 337~345번대 미사곡은 요제프로 표기되었지만, 미하엘의 독일어 미사(Deutsche Messe, MH 560)다.
결론적으로 한국 가톨릭 성가집의 ‘하이든’ 대부분이 동생 미하엘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뜻밖이다. 음악사에서는 형 요제프가 압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형제의 출발점은 비슷했다. 그들은 빈의 작곡가 로이터(Johann Georg Reutter) 지도 아래 성 슈테판 대성당 소년합창단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둘이 그려나간 궤적은 상당히 달랐다.
요제프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궁정 악장으로 일하며, 교향곡과 실내악을 포함한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그는 소규모 종교음악도 작곡했지만, 후기 미사들은 화려한 편성과 성악이 어우러진 ‘음악적 대서사시’에 가깝다. 이런 미사는 당시 교회 관행과는 거리가 있을 만큼 콘서트에 가까운 광휘와 장대함을 지녔다.
반면 미하엘은 잘츠부르크대교구장 직속의 궁정 성당에서 44년간 봉직하며 전례음악에 전념했다. 무엇보다 미하엘은 전례와 미사 자체에 주목했다. 그는 미사 통상문을 음악으로 표현할 때 가사 전달이 뚜렷하게 이루어지도록 세심하게 작곡했다. 이를 음악학자 제인 헤트릭은 미하엘이 ‘수사적(oratorical) 접근’을 취했다고 말한다. 그의 전기는 그 노고를 생생히 증언한다. “미하엘 하이든은 작곡을 위해 펜을 들기 전 오랫동안 주제를 숙고했다. 모든 가사의 음절 아래 해당 음이 명확하게 배치되었고, 그 위치는 발음이 정확히 들어맞는 곳에 자리했다.”
이런 시도는 교회 공간과 반복되는 전례력 속에서 빛을 발했다. 당대 빈이나 잘츠부르크는 지나치게 화려한 음악으로 미사를 뒤덮거나, 불필요한 기교 과시를 절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요컨대 요제프의 후기 종교 곡이 다소 세속적 성향을 지닌다면, 미하엘은 신자들이 미사에 집중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미하엘 하이든의 음악은 생존 당시뿐만 아니라 사후 교회 내에서 애창되었다. 그의 이름은 지역 음악계에서 친숙하여, 오스트리아 각지의 성당에 악보들이 전파되어 연주될 정도였다. 1820~1890년대 문헌에 따르면, 그의 성음악은 형 요제프나 모차르트 미사곡보다 교회에서 더 자주 봉헌되었다. 이는 그의 음악이 단순히 ‘형에게 가려진 재능’이 아니라, 전례 안에서 꾸준히 선택되고 사랑받았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형 요제프는 동생을 매우 높이 평가했으며, 미하엘의 종교음악이 자신의 작품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가톨릭 성가」에 실린 미하엘의 곡들은 이런 맥락을 반영한다. 우리는 미하엘 하이든과 같이 ‘언제나 주님과 함께’를 부르며 ‘영광의 왕께 찬미를’ 드린다. 성체를 모시며 ‘생명이신 천상 양식’을 노래한다. 그의 음악은 호화로움이나 장엄함으로 위압하지 않는다. 신자들이 미사와 기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돕는, 마치 교회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고요한 빛과 같다.
악보를 넘기며 ‘Haydn’이라는 이름을 볼 때마다 두 형제를 떠올린다. 형이 화려한 미사와 극적인 오라토리오에서 두각을 드러냈다면, 동생은 전례음악에서 조용히 빛났다. 둘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부질없으리라. 형제는 각자 방식대로 신앙과 음악을 직조했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가톨릭 성가」는 미하엘 하이든을 더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 _ 박찬이 율리안나 (음악 칼럼니스트)
공예학부와 시각정보디자인 학과를 졸업하고, 미학도 함께 공부했다. 공연기획자 및 감독 등으로 일했으며 현재 음악 및 미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