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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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건너서 마을로…’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하는 아침에 하늘을 보며 윤동주 시인의 시 <새로운 길>을 되뇝니다. 오늘 하늘은 연한 하늘색이고 제가 걷는 길에는 내와 숲이 없습니다. 다만 가파른 고갯길과 지하철역을 지납니다. 광화문 사거리를 건너서 지하철로, 동대문을 지나서 학교로. 시 구절을 살짝 바꾸어 봅니다.


매일 지나는 길을 지겹다고 생각하지 않고 새로움을 불어넣는 힘, 시의 마음이 영성의 지혜를 담고 있다 싶어 오래전 시인에게 새삼 고맙습니다. 영성이란 무엇일까, 매일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매일 새로움을 찾아 기쁘게 힘을 얻고자 하는 시인의 시가 영성에 닿아 있다 싶어요. 그러고 보니 가파른 길을 안전하게 운전해 주시는 마을버스 기사님도 고맙고, 복잡한 지하철 1호선의 사람들도 정답게 느껴집니다. 바쁘게 내리며 제 어깨를 치고 나간 키 큰 남자가 밉지 않게 느껴지는 것도 시의 언어가 전해주는 영성의 힘인 것 같습니다.


저는 매일 말을 생각합니다. 문학 연구자로서 시의 말을 고민하고, 번역가로서는 영어에서 한국어로, 한국어에서 영어로 적절히 잘 옮길 단어들을 매만지다 보면, 늘 말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러니만큼 말의 힘을 조금 더 예민하게 감지하게 됩니다. 이 강퍅한 세상에서 말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 이왕이면 세상의 소금 같은 귀한 말을 더 널리 퍼뜨리기를 바라며 매일 말을 고르고 말 안에서 울고 웃습니다.


좋은 말이 나태한 마음속에서 오염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누가 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좋은 말이 나쁜 말로 바뀌기도 하고, 말하는 사람이 말의 주인이 아니라 말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힘들고 지치면 하늘을 올려다보고 겨울나무를 무연히 바라보기도 하지만, 숨구멍이 될 말을 찾고 희망이 되는 말씀에 기대어 볼 때 든든해집니다. 그러면 견딜 수 없는 순간이 견딜 만하게 바뀌기도 해서, 좋은 말은 그대로 숨구멍이 됩니다.


이 지면에서 여러분과 사람을 살리는 말들을 나누고자 생각하니, 새롭게 시작된 2026년이 두근두근 더 기대됩니다. ‘…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은 새로운 길 …’ 시인은 그 길에서 민들레와 까치를 만났는데, 우리는 누구를 만나게 될까요. 저는 오늘 아침 노란 외투를 입고 아장아장 첫걸음 걷는 아가를 만났습니다. 동글동글한 목소리의 아가는 아빠가 잡아주려는 손을 마다하고 혼자 걷겠다고 떼를 씁니다. 나 혼자 할래, 자아가 생긴 아가는 앞으로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손을 잡을까요? 그 아가가 자라날 세상엔 어떤 꽃이 피어날까요?


하느님 만드신 이 세상이 더 고운 사람들 속에 이어지길 기도하며 지하철에서 내립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 싸한 겨울 공기를 들이쉬며 나를 살리는 말 한마디로 부드럽게 새 마음을 채우니 오래된 낡은 길도 새롭게 보입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영문학자, 영미시 번역가. 우리 시를 영어로, 영미 시를 우리말로 옮겨 알리는 일에 정성을 쏟고 있다. 시가 전하는 사유를 나누기 위해 매일 읽고 쓴다. 산문집 「바람이 부는 시간」, 「딸기 따러 가자」,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 「홀로 함께」 등과 다수 번역 시집을 출간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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