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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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지 사이소~”… 지식인 허물 벗고 하느님께 취직하다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도시 빈민의 대부, 제정구 바오로 - (3) 판자촌의 구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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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동 판자촌 복음자리의 김수환 추기경과 정일우(오른쪽) 신부와 제정구(왼쪽)


1973년 서울대 복적… 청계천으로 이사
낮엔 단무지 행상·밤엔 야학 교장 소임
청계천 주민들과 양평동 집단 이주

영혼의 단짝 정일우 신부와 함께 살며
‘더불어 살아가는’ 빈민운동 원칙 확립
옥바라지한 연인과 40일 기도 후 결혼

“판자촌서 나오면 취직시켜 주겠다”
중앙정보부로부터 솔깃한 제안 받고
판자촌에서의 삶 하느님 뜻으로 확신



충격적인 청계천 판자촌의 실상

‘하느님 백성의 생존을 위해 저를 오롯이 바치나이다.’

서울 청계천 송정동 판자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72년이었다.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활빈교회 야학교사가 되면서였다. 청계천 뚝방에 올라서서 내려다본 풍경은 충격적이었다. 둑과 개천 사이의 공터에 다닥다닥 붙여 지은 판잣집, 가마니와 비닐로 덮고 두른 움막, 나무막대에 천을 걸쳐놓은 삼각 텐트, 콜타르 먹인 종이에 모래를 뿌려놓은 지붕, 처마에 매달린 빨랫줄과 옷가지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공중화장실, 회색빛 흙바닥과 얕은 시궁창?.

2400여 세대가 사는 청계천 판자촌은 산 자가 갈 수 있는 가장 막다른 골목, 즉 지상의 막장이었다. 그동안 그려왔던 민중의 실체와 서민의 삶이 그럴싸하게 포장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곳을 외면한 진리와 정의와 자유는 공허한 외침이었다. 이들이 제 모습을 찾고 제 목소리를 낼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오리라 여겼다. 흙바람이 부는 뚝방에 서서 그들과 함께하겠노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1973년에 복적되면서 아예 청계천으로 이사했다. 활빈교회의 야학인 배달학당의 교장 소임을 맡았다. 처음에는 기도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엿장수를 돕거나 넝마주이를 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내 나름의 번듯한(?) 직업이 있어야만 했다. 단무지 행상에 나섰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청량리 단무지 공장에서 20여 관을 사서 수레에 싣고 다니며 팔았다. 창피하기도 하고 아는 사람을 만날 것 같기도 해서 ‘단무지 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늦게까지 길거리를 헤매다 녹초가 돼서 돌아왔지만, 자존심이 상해 잠도 오지 않았다. 옷가슴에 학교 배지를 달고 옆구리에 책을 낀 서울대생과 밀짚모자에 까만 고무신을 신은 판자촌 총각의 모습이 교차했다. 사흘째 되던 날 밤, 비로소 내가 얼마나 교만과 허위에 젖어있는지를 통렬하게 깨달았다. 뚝방에서의 결심은 지식인의 그럴싸한 이념이자 이상이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손수레를 힘차게 끌며 칼칼한 경상도 억양으로 외쳤다.

“단무지 사이소! 달콤하고 짭짤한 단무지가 왔심더.”

그날부터 청량리와 종로 일대를 누빈 수레는 일찌감치 속을 비워내고 청계천으로 돌아왔다. 당시 나는 판자촌 주민들과 공동체로 살기 위해 연세대 부설 도시문제연구소가 운영하는 ‘공동체 조직 전문가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수하자 활동비로 매달 2만 원씩 지급됐다. 11개월간 투옥됐을 때도 활동비가 지급돼 석방 후에는 그 적립금으로 구두닦이 터를 매입할 수 있었다. 소년 구두닦이 선배 둘이 나를 가르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독하다’는 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노동이 곧 판자촌 주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자 기반이었던 것이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삶은 그해 말 정일우 신부와 한 달간 함께 지내며 더욱 활기를 띠었다.

 
청계천 판자촌 송정동 지역사회학교 배달학당


시튼 성인 전기 읽고 가톨릭 영성에 이끌림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자마자 청계천 판자촌에 철거 계고장이 날아들었다. 당시 서울 명동대성당의 보좌로 있던 정일우 신부는 판자촌이 철거되더라도 주민들과 다른 곳으로 이주해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나 역시 원하던 바였다. 반면 정부 지원을 받은 활빈교회 측은 소금땅이라 당장 농사짓기 어려운 남양만 간척지로 이주할 것을 고집했다. 그들에게는 청계천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문제보다 지역 선교 프로젝트 지원금을 받아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실망스러웠다.

그때 우연히 손에 든 책이 「엘리사벳 앤 시튼 전기」였다. 1774년 미국 뉴욕의 성공회 집안에서 태어난 시튼은 남편 사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해 미국 최초의 가톨릭 교구 학교와 사랑의 시튼 수녀회를 창설했다. 지극한 사랑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가르치고 돌보던 그녀는 최초의 미국 출신 성녀로 시성됐다.

‘내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할 때 가난 속에서도 풍요로울 수 있으며, 깊은 고뇌 속에서도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녀의 전기를 읽으며 내 가슴속 갈증의 실체를 깨달았다. 바로 사랑이었다. 개신교에서 중시하는 외적 능력보다 침묵, 명상, 기도, 내적 충만감에서 오는 사랑이 중요했다. 이후 나와 정 신부는 철거민들의 생존 근거를 마련하는 집단 이주에 힘을 쏟았다. 마침내 그해 11월 양평동 뚝방 판자촌으로 이주하기로 했다. 정 신부는 7평, 나는 4평짜리 집을 구입했다. 정 신부 집의 5평은 사람들이 와서 놀거나 공부하거나 미사 드리는 사랑방으로 만들었다. 1976년 2월 11일 김수환 추기경이 사랑방 축복 미사를 드린 후 명명했다.

“포근하고 아늑한 보금자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나누는 복음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때 나는 영혼의 단짝이자 스승인 정 신부와 약조했다. 정부나 후원단체에서 지원받는 프로젝트를 하지 않고, 그냥 주민들과 이웃으로 살면서 그들이 하는 일을 함께하며 거들자는 빈민운동의 원칙을 세웠다. 주민들을 계몽하거나 계도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자는 것이었다. 나를 버리고 비우는 빈손의 자유라고나 할까. ‘가짐 없는 큰 자유’라는 지인이 써준 서예 글씨가 잘 어울렸다.

 
양평동 판자촌 복음자리 현판식
 
함석헌 선생 주례 열린 제정구의 결혼식.
김수환 추기경과 제정구(가운데 오른쪽) 첫 딸 아름을 낳은 후에 부인 신명자(가운데 왼쪽)씨, 정일우(왼쪽 맨 끝) 신부.
 
시흥 복음자리마을에서 세 딸과 제정구
 
가짐 없는 큰 자유


심훈 소설 「상록수」 주인공 닮은 부부

1976년 4월, 서른세 살 노총각이던 나는 아홉 살 연하의 한신대 신학생인 신명자와 결혼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1973년 여름이었다. 당시 대학 새내기였던 그녀는 활빈교회에 종종 봉사하러 왔다. 배달학당의 교장이었던 나는 그녀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내가 투옥되자 옥바라지해줄 만큼 매사에 적극적이고 마음씨 고운 그녀와 속마음을 나누게 됐다.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어 동지이자 연인이 됐다는 심훈의 「상록수」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과 흡사했다. 제정구는 학업을 중단한 박동혁이었고, 신명자는 여자신학교를 다니던 채영신이었다.

그러나 결혼은 순탄치 않았다. 신랑감이 판자촌에 사는 대학 제적생이자 전과자였으니 그녀의 부모가 반대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아내는 집에 감금됐고, 나는 정 신부 지도로 속리산 상환암에서 나흘간 피정했다. 그때 신부가 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성직이나 혼인이나 모두 구도자의 길임을 깨달았다. 결혼이 내게 맞는 수행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40일간 기도하자고 했다. 공생활에 앞서 광야에서 40일간 지내며 기도했던 예수님의 길을 체험하고자 했다. 마침내 운명적인 결혼식 날, 주례를 맡은 함석헌 선생은 1시간 반에 걸친 주례사를 통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하늘을 향해 곧추서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구도자가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가르침이었다.



양평동 판자촌에서 신혼살림

우리 부부는 양평동 판자촌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신혼부부는 큰 방, 정 신부는 작은 방에서 함께 지냈다. 그곳에서 첫딸 아름이를, 후일 이주한 시흥에서 둘째 딸 아미와 셋째 딸 빈나를 낳아 키웠다.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취직하고자 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그때 중앙정보부에서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판자촌에서 살지 않고, 정일우 신부와 함께 지내지 않는다면 당장 취직시켜준다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섭리는 참으로 절묘했다. 나는 그 제안을 듣자마자 그 반대로 판자촌에서 정 신부와 함께 사는 것이 진정 하느님 뜻이라 여겼다. 그날 호주머니에 있던 전 재산 3000원을 털어 성경을 샀다. 그 첫 장에 큼직하게 기념 사인을 했다.

‘축 취직 기념(하느님께) 1976년 9월 1일’

판자촌 공동체는 비록 손에 쥔 것은 없지만, 사람 냄새가 나는 인간적인 집단이었다. 누군가에게 붙들리거나 어딘가에 갇힐 염려가 없었고, 어떠한 간섭이나 속박 없이 제 할 일 하며 사는 자유로운 곳이었다. 구도자의 길이 따로 있나 싶었다. 수도원이나 사막이 아닌 판자촌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삶이 평화로웠다. 전지하신 하느님을 향한 다윗의 고백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시편 139,7)   <계속>


 
김문태 힐라리오(한국평단협 수석부회장, 문학박사)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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