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30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아부지 앞에서 실컷 울어라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최근에 울어본 적 있어요?’ 얼마 전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물었지요. ‘주말에 전시회 같은 데 가서 혼자 눈물 좀 흘려보세요.’ 


좀 재미있는 처방을 받고 나오며 눈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저는 눈물이 많은 편인데, 사람들 앞에서는 잘 울지 않으려 합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교적 교육 때문일까요.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감정 표현을 절제하셨어요. 예뻐도 예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최고의 칭찬은 ‘수고했다’가 전부. 


박사 논문이 통과된 후 미국에서 전화를 드렸을 때도 ‘수고했다’고 하셨는데, 전화를 끊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걸 나중에 어머니에게서 들었지요. 어릴 때 제가 울면 아버지는 ‘울지 말라’고 야단을 치셨고요. 그 말씀에 눈물은 뚝 그쳤지만 서운함은 마음에 고였지요.


엄격한 아버지와 저 사이에 고여 있던 감정의 강이 기적처럼 풀린 일이 있었어요. 어느 날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만 눈물이 나왔는데 그날은 허허 웃으시더니, ‘울어라, 실컷 울어라. 아부지 앞에서 실컷 울고 가라’ 하시는 거예요. 그날 제가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의 그 말씀에 오래 고여 있던 서운함이 확 풀렸던 기억은 선명해요.


그 효과를 경험한 뒤로 가끔 써먹곤 합니다. 진로상담을 하러 온 학생이 앉자마자 울면, ‘울어라. 무슨 일인지 몰라도 내 앞에서 실컷 울고 가라’고 말해줍니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그 학생은 지금 씩씩한 공무원이 되어 잘 살고 있는데, 그 말이 참 고마웠다고 합니다. 다부진 직원 선생님이 어떤 일로 눈물 글썽여도, ‘실컷 울다 가라’고 합니다.


울음이 뭘까요. 울음은 터져 나오는 거지요. 고여 있다가 터져 나오는 것이 슬픔이든 서러움이든, 누군가 운다면 실컷 울게 하는 게 맞지 싶어요. 가짜 눈물도 있지만요. 매일 수많은 일 사이에서 오해, 불의, 불합리와 씨름하는 우리는 어쩌면 저마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일 텐데, 그러니 너무 힘들면 울어도 된다고요. 특히 아버지 앞에서는 실컷 울어도 된다고요.


이 글을 쓰는 중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었어요. 지병이 있으셨으나 건강하셨던 아버지. 가벼운 감기를 앓으셨는데 갑자기 3일 만에 이 세상에서 거두어졌어요. 왜 아버지를 이런 식으로, 하늘나라로 부르시는지, 하느님의 뜻을 여쭈어봅니다. 생은 찰나라는 것, 어느 때고 ‘늘 준비하고 있으라’는 두 말씀으로 알아듣고 그리움을 간추립니다.


힘들 때 생각하곤 합니다. 내 눈물 아는 이가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아버지가 아셨던 눈물은 하느님 아버지도 아시겠지요. 장례식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오기 전 샛별을 보면서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나는 내 몫을 살고, 너는 네 몫을 살면 된다. 그러자꾸나.” 


돌아와 다시 말에 기대어 봅니다. ‘제 눈물을 당신 부대에 담으소서.’(시편 56,9) 인간의 눈물과 함께 당신의 책을 쓰신 하느님. 울고 싶다면 울어도 된다고, 아버지 앞에서 실컷 울어도 된다고. 그렇게 마음을 먹고 한 걸음 또 내딛습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5-12-30

관련뉴스

말씀사탕2025. 12. 30

시편 109장 26절
저를 도우소서, 주 저의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구원하소서.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