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31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베일을 벗는 순간의 감동 [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80)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주님 공현 대축일’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사건을 기념하는 그리스도교 전례 축일이다. 전통적으로 동방 박사들의 아기 예수님 경배, 요르단강에서의 예수님 세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첫 기적을 공현의 대표적 순간으로 본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이 가운데 특히 동방 박사의 경배를 중심에 두고 기념하고 있다. ‘공현(公顯, Epiphany)’이란 말이 뜻하듯, ‘드러남’ ‘나타남’, 곧 감추어져 있던 힘이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유독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축일이기도 하다. 부활절이나 성탄절처럼 뚜렷한 상징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것을 축하한다’는 표현이 어딘가 겸연쩍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숨겨진 힘의 드러남이라는 주제는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이야기에서 반복되어 온 가장 강력한 서사적 모티브다.

배트맨과 슈퍼맨이 자신의 힘을 일반인들에게 드러내고 애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뻔한 클리셰이지만 뭔가 울컥하는 것이 있다. ‘스파이더 맨’ 영화의 최신작에 자신의 정체를 아는 몇몇 친구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 그가 세상을 구하는 조건이라는 설정이 나온다. 힘겹게 자신을 드러냈지만 그것을 다시 기억에서 지워버린다는 것의 허무함과 외로움을 청중에게 묻는다.

삼손은 사자를 찢어 죽이면서 그의 힘을 공현했고 헤라클레스는 갓난아기일 때 두 마리 뱀을 눌러 죽이며 그 존재를 알렸다. 좀더 순하게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제인 오스틴은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 다아시의 너그러움과 사려 깊음을 결말에 가서 주인공이 알도록 구성했고, 이 소설은 이후 모든 하이틴 소설의 초석이 되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재벌집 아들이 평사원으로 입사해 러브스토리를 만드는 것도 유사한 서사의 일종이다. 감추어진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의 감동, 그리고 그 드러남이 만들어내는 관계와 의미의 변화는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의 핵심이다.

음악에서도 주님 공현 대축일은 풍부한 영감을 제공했다. 바흐는 이날을 위한 여러 칸타타를 작곡했는데, 그중 칸타타 BWV 65 ‘우리는 와서 향과 금을 바치리라’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바탕으로 하며 동방 박사의 여정을 묘사한다. 이밖에도 BWV 123·124·153가 공현절을 위한 칸타타로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 바흐 소사이어티에서 연주한 바흐의 칸타타 BWV 65

//youtu.be/qhzr7EU6XS8?si=zSMNvqO53Xly1AK8

독일 바로크 음악의 거장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ütz)의 ‘세 동방 박사 이야기’ 역시 주님 공현 대축일과 관련된 대표적 작품이다. 우아하고 가벼우며 아름다운 선율, 그리고 당시 독일 음악계에 이탈리아 양식을 도입한 그의 업적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는다.

//youtu.be/ypnjbeinJ5Q?si=fUqP9dsFJtcPWptQ

귀에 익은 클래식 작품으로는 레스피기(Ottorimo Respighi)가 보티첼리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인 ‘보티첼리의 세 개의 그림’ 중 2악장 ‘동방 박사의 경배''가 있다. 오리엔탈리즘과 신비로움이 가득한 음악이다.

주세페 시노폴리가 지휘한 레스피기의 ‘동방박사의 경배’

//youtu.be/ZlRA83f1YYo?si=QcbHgW5_JOmnqnQZ


작곡가 류재준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12-31

관련뉴스

말씀사탕2025. 12. 31

시편 36장 10절
정녕 주님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주님의 빛으로 저희는 빛을 보나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