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3일 태국 타래-농생대교구 주교좌 성 미카엘 대성당 일원에서 카퍼레이드 중 가톨릭 미션스쿨의 브라스 밴드가 행진하고 있다.
브라스밴드와 화려한 카 퍼레이드
불교 신자도 행사 기획에 참가
종교 상관없이 지구촌 축제로 성장
태국관광청, 올해의 3대 축제 선정
가톨릭 행사 넘어 지역 구심점 역할
태국 동북부 싸컨나콘(Sakon Nakhon)은 방콕에서 비행기로 1시간 반가량, 그중에서도 더 깊숙한 타래(Tha Rae)는 공항에서 차로 1시간을 내달려야 닿는다. 태국 동북부의 낯선 땅인 이곳은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1884년 태국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낯선 땅이었다. 박해를 피해 뗏목을 타고 넘어온 태국 가톨릭 선조들은 타래에 교우촌을 형성했다. 작은 공동체는 140년이 지난 현재 태국 최대의 가톨릭 공동체를 일구어냈다.
이곳에서 주님 성탄 대축일마다 이뤄지는 ‘크리스마스 별 퍼레이드’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다. 대나무와 종이로 별을 만들어 불을 밝히며 마치 동방 박사가 별을 따라간 것처럼 자신들의 이주 역사의 정체성을 지켰던 축제다. 이제는 태국만이 아니라 지구촌에서도 이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타래와 싸컨나콘을 찾을 만큼 유명해졌다. 태국정부관광청이 선정한 ‘올해의 타이 시그니처’ 3대 축제에도 이름을 올렸다. 방콕에서 왔다는 찰리씨는 “불교 신자이지만 성탄 때마다 이곳을 방문한다”고 했다. 스웨덴에서 왔다는 모하메드씨는 “스웨덴보다 성탄 분위기가 물씬 난다”며 “놀랍고 즐거운 체험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본지는 태국정부관광청과 타래-농생대교구 주교좌 성 미카엘 대성당과 싸컨나콘 시내에서 벌어지는 빛의 축제, 크리스마스 별 퍼레이드를 동행 취재했다.
박해를 피해 이주한 베트남계 신자
타래 마을에 들어서면 거대한 방주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배 모양의 타래-농생대교구 주교좌 성 미카엘 대성당 모습은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한다. 독특한 성당의 외관은 신앙 선조들의 탈출 역사와 무관치 않다.
1884년 싸컨나콘 시내에서 차별과 박해로 고통받던 베트남계 신자 150여 명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하비에르 게고(Oliver-Jean Xavier Guego) 신부는 종교 박해를 피해 태국 북동부의 최대 호수인 농한 호수를 건넜다. 나무 판자로 만든 뗏목에만 의지해서다. 이들은 호수를 건널 당시 거친 풍랑을 만났고 성 미카엘 대천사에게 기도하며 보호를 청했다. 고생 끝에 무사히 타래에 도착한 신자들은 이곳에 정착해 선교를 이어나갔다. 타래-농생대교구는 정착기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 주교좌 성당 기념관 안쪽에는 신자들의 정착했던 시절부터 당시 주교의 모습과 게고 신부의 동상·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태국은 불교 국가임에도 타래 지역에만 약 1만 5000명의 신자가 있을 만큼 교세가 성장했다. 과거 방콕대목구 소속이었지만 현재는 싸컨나콘·나컨파놈·칼라신·묵다한 등 4개 지역을 관할하는 대교구로 거듭나 5만여 명의 신자가 있다. 1950년대부터는 외국 선교사가 아닌 현지인 주교와 신부가 교구를 맡아 사목하고 있다. 타래 토박이 성 미카엘 대성당 주임 찰름 신짤라 신부는 “태국에서 단일 지역으로는 신자가 가장 많은 곳”이라며 “불교 신자들도 함께 살지만 갈등 없이 아주 평화롭게 지낸다”고 말했다.
동방 박사의 별
성경에서 별은 동방 박사 세 사람을 아기 예수가 있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으로 인도했던 상징이다. 이곳 신자들은 동방 박사를 이끌어 준 별처럼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신앙 고백을 한다. 타래에 처음 발을 들여놨던 신자들의 여정은 별 하나만 보고 낯선 길을 나선 동방 박사의 여정과 닮았기 때문이다. 별은 타래 신자들의 역사적 정체성이기도 하다.
싸컨나콘과 성 미카엘 대성당을 찬란히 밝히는 별 퍼레이드는 소박하게 시작됐다. 신짤라 신부는 “별 예식은 대나무와 종이로 만든 작은 별을 손에 들고 성당 주변을 돌며 기도를 바친 것에서 시작됐다”면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적극 참여하며 성당 주변을 행진하는 예식으로 자리 잡았고, 지금의 축제로 이어져 왔다”고 말했다.
별 퍼레이드는 신자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큰 의미를 지닌다. 타래 파티마 학교 담당 존 차차이 신부는 “이곳을 찾는 이들 중엔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많다”며 “그들에게 별은 종교적 상징을 넘어 ‘인생의 길잡이’이자 ‘행운’을 의미한다. 그래서 종교와 상관없이 모두가 별을 들고 함께 기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2월 23일 태국 타래-농생대교구 주교좌 성 미카엘 대성당이 핑크빛 조명으로 밝게 빛나고 있다.
12월 23일 태국 타래-농생대교구 주교좌 성 미카엘 대성당 일원에서 열린 카퍼레이드 중 부스에서 어린 아이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본당 축제에서 시민들의 축제로
교구 신자 공동체의 작은 행사가 싸컨나콘 시민들의 축제로 거듭난 지는 40여 년이 됐다. 1980년부터 2004년까지 교구장을 지낸 카이 샌폰-온 대주교는 1982년 성탄의 기쁨을 모든 시민과 함께 나누자는 취지로 별 퍼레이드를 싸컨나콘 시내 중심가까지 확장했다. 이때부터 대나무와 종이로 만든 별을 가지고 거리를 행진하는 게 싸컨나콘만의 지역 축제가 됐다.
2025년 12월 23~24일 성 미카엘 대성당 일원, 25일 싸컨나콘 시내에서 열린 퍼레이드에 동원된 차량은 각각 50여 대. 모든 차량이 행진을 마치기까지는 2시간이 걸렸다. 카 퍼레이드의 출발점에 서서 차들의 행렬을 바라보면 끝 지점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인근 가톨릭 학교 브라스 밴드 단원들의 행렬을 기점으로 시작된 카 퍼레이드는 본당 복사단, 나자렛회 등이 네온사인 별을 휘감은 트럭을 타고 타래와 싸컨나콘 시내 곳곳을 누비며 시민들과 주님 성탄의 기쁨을 함께했다. 인근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 케이트 겁키엔 양은 “이 축제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예수님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타래와 싸컨나콘에서는 곳곳에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이들이 퍼레이드 차량에 올랐으며, 길가의 아이들은 차에서 뿌려지는 사탕을 얻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람들 면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관광객과 현지인 가릴 것 없이 휴대전화로 퍼레이드 분위기를 담기에 바빴다. 대성당 일대와 싸컨나콘 시내에서는 야시장도 열려 다양한 먹거리와 장식품으로 사람들 입과 눈을 즐겁게 하며 축제 분위기를 한층 더했다.
행사를 기획하는 이들 중엔 불교 신자도 있을 만큼, 별 퍼레이드는 가톨릭 교회 행사를 넘어 타래와 싸컨나콘 지역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싸컨나콘에서 사는 노르웨이 출신 아르넨씨는 “수년 간 이곳에서 축제에 참여했는데, 이 축제가 마을 공동체를 묶고 있다”고 말했다.
현지 사제들은 한국 청년들과 함께 이 축제를 즐기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한국 신자들의 깊은 신심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곳 타래의 별 축제는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특별한 경험입니다.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이 와서 빛의 축제를 함께 즐기고, 서로의 문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차차이 신부)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를 잘 알고 있습니다. 태국 청년들도 많이 참가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 신자들도 타래에 오셔서 기쁨을 함께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든 환영합니다.”(신짤라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