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31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여기 사람이 살고 있어요!”… 정일우 신부와 판자촌 강제철거에 저항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도시 빈민의 대부, 제정구 바오로 - (4) 철거민의 대변인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유쾌하고 낙천적인 정일우 신부(오른쪽)와 제정구.


1980년 전후 판자촌 철거 본격화
양평동 판자촌 철거 계고장 받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도움 요청
독일서 융자금 받아 복음자리 이주

도시 빈민들과 동고동락
철거민들과 함께 천막 기거하며
기댈 어깨 내어주고 하소연 들어줘
봉천·목동 등서 쫓겨난 철거민들
복음자리 마을 인근 집단 이주 도와




시흥 복음자리 마을 탄생

“여기 사람 있어요, 사람이 살고 있다고요!”

나는 결혼해 일 년 남짓한 시간을 행복하게 지냈다. 동네 주민들의 요구로 유치원을 열어 교사 일을 하는 아내, 그리고 유쾌하고 낙천적인 정일우 신부와 즐겁게 지냈다. 그러나 그런 행복도 잠시였다. 1977년 3월 말까지 양평동 판자촌을 철거하라는 계고장이 날아들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와 정 신부는 고민 끝에 김수환 추기경에게 도움을 청했다.

정 신부는 가톨릭 구호단체 미제레올선교회에 보내는 김 추기경의 편지를 들고 독일로 건너가 융자금을 받아왔다. 우리는 그 돈으로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 33번지(현 시흥시 신천동) 땅을 매입했다. 마침내 4월 10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고별 미사를 드린 후 170세대가 시흥으로 집단 이주했다.

시흥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천막 세우기였다. 15인용 대형 천막 75개를 과일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세우고 ‘복음자리’ 마을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말만 복음자리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이주민들의 이기심과 불신이 분란을 일으켰다. 천막 자리를 놓고 다투었고, 살만한 곳이 못 된다며 불평했으며, 집 지을 땅을 계약하고 해약하는 일을 반복했다. 심지어 계약금을 떼먹고 달아나지 않을까 의심하기도 했다.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을 이끌고 나온 모세에게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한 대목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내가 붙여준 별명처럼 펄펄 뛰는 야생마였던 나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갔다. 나는 현장 사무실에 걸린 십자고상 앞에 서서 부르짖었다.

“제가 왜 이런 모진 일을 당해야 합니까? 이 들에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조금 있으면 저에게 돌을 던질 것 같습니다.”

잠시 후 단말마의 신음이 울렸다. “나를 보아라!”

사람들이 뺨을 치고 옷을 벗기고, 채찍질하고 가시관을 씌우고, 십자가를 지우고 못을 박고, 창으로 찌르고 조롱했지만, 사람의 아들은 묵묵히 갈 길을 갔다. 마침내 ‘다 이루어졌다’는 말과 함께 숨을 거뒀다. 그런 초연하고 담대한 모습이 내가 짊어지고 따라야 할 십자가였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라는 말씀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순간 팥죽 끓듯이 부글거리던 마음이 해무와 같이 가라앉았다. 갈대처럼 흔들리던 몸이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킨 느티나무와 같이 곧게 섰다.



생지옥에서 만들어가는 생천국

시간이 지나면서 전기가 들어오고, 우물물이 솟아오르고, 아이들의 학교 문제가 해결되자 불만의 소리가 점차 수그러졌다. 마침내 1977년 9월 2일, 170세대가 살 60호의 주택이 틀을 갖췄다. 김수환 추기경이 입주 미사를 주례했다. 이듬해 초 마을회관 완공식이 열렸다. 나와 정 신부, 그리고 총무직을 하며 동분서주하다 후일 사제품을 받고 인천교구 신부가 된 동생 정원이 주민들에게 감사패를 받았다.

비로소 생명체가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가 만들어졌다는 감격이 밀려왔다.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부딪치고 갈등하고 싸우다가 슬며시 화해하고 노래하고 춤추며 하나가 되는 용광로 같은 공동체 말이다. 하느님의 숨결로 빚어진 활기찬 생명이 구가하는 대동의 세상이 바로 지상의 하느님 나라 아닐까. 생지옥에서 만들어가는 생천국! 나 역시 점차 하느님 백성이 돼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왕초 예수님의 참 졸개가 된 기분이랄까.

 
철거현장
복음자리마을 건축 현장
시흥 목화마을 입주미사
시흥 목화마을 입주미사.

1980년대 철거 잔혹사와 생존권 투쟁

굴삭기가 굉음을 내며 ‘철거반대’라 쓰인 시멘트 블록 벽을 무너뜨렸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서 밥을 먹던 식구들이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철거반원들이 굴삭기에 매달리며 울부짖는 식구들을 인정사정없이 패대기쳤다. 햇볕에 검게 그을은 가장은 삽자루를 들고 달려들다 용역 깡패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중년의 아내는 비정한 사내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소리쳤다. 노인들은 흙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고, 아이들은 가냘픈 팔뚝으로 눈물을 훔쳤다. 날카롭고 처절한 외침이 연방 허공을 갈랐다. 철거 전쟁터였다.

허물어진 집터마다 세간살이가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찌그러진 양은 세숫대야, 실로 꿰맨 바가지, 짝 잃은 벙어리장갑, 옆 터진 실내화, 찢어진 교과서?. 정부가 내건 ‘복지사회’와 ‘민주사회’는 허울 좋은 구호였다. 일제강점기의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리라’ 노래했던가. 절망적인 철거 난장판에도 실낱같은 희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콘크리트 틈새로 노란 민들레꽃이 앙증맞게 고개를 내밀었다. 하얀 민들레 홀씨는 내일의 새싹을 예고하며 눈부신 창공으로 아스라이 날아올랐다. 짓밟히고 버려진 잡초에서 도시 빈민의 끈질긴 생명력이 배어났다. 돈 있고 힘센 자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하느님 사랑은 미물을 통해 그렇게 소리 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청계천을 위시한 판자촌 철거는 1980년을 전후해 본격화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해 열악한 환경을 일소하겠다는 정부 시책이었다. 전투경찰과 백골단, 용역 깡패들이 판잣집과 천막을 닥치는대로 부쉈고, 울부짖는 주민들을 무참히 유린했다. 나와 정 신부는 철거민들과 함께 천막에 기거하며 강제철거의 폭거를 온몸으로 막고자 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철거민들에게, 아니 부유하고 권세를 누리는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증거하고자 했다. 억울함과 서러움과 참담함에 눈물 흘리는 이들에게 기댈 어깨를 내주었고, 목이 쉬어 소리가 나지 않는 하소연을 들어주는 귀가 돼주었다. 위로자이신 성령과 보호자이신 성모님을 대신하여?.



복음자리 인근 이주 마을 확장

강제철거된 터에 세워지는 고층아파트는 철거민들이 바라볼 수 없는, 있는 자들의 잔칫상이었다. 나와 정 신부는 1979년 시흥동, 봉천동, 망원동 등지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을 복음자리 마을 인근으로 집단 이주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땅을 구입할 돈이 문제였다. 때마침 복음자리 마을을 조성하기 위해 독일 미제레올선교회에서 받았던 융자금을 다 갚았는데, 선교회 측에서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그렇게 융자금을 전액 상환한 사례가 없다며 재차 융자해줬다. 자비로운 하느님의 손길이었다. 철거민 164세대를 집단 이주시키고, ‘한독마을’이라 명명했다. 한국과 독일이 힘을 합쳐 만든 마을이라는 뜻을 담았다.

정부는 1984년 목동을 철거했다. 이십여 년 전에 후암동, 대방동, 이촌동 등지에 살던 이들을 강제 이주시킨 곳이었다. 자연히 주민들의 반발은 여느 지역보다 거셌다. 비행기가 내려앉으며 보이는 판자촌이라 미관상 철거한다고 했다. 그러나 실상은 부동산 투기 바람에 편승해 국제 스포츠 행사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와 정 신부는 보상도 없이 강제철거에 나선 목동으로 달려가 반대 투쟁을 벌였다.

그때 ‘도시빈민운동’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고, 내게는 ‘빈민운동의 대부’라는 칭호가 붙었다. 투쟁하는 동안 14명의 주민이 사망한 비극의 현장이었다. 그중 105세대는 1985년 복음자리 마을과 한독마을 인근으로 집단 이주해 ‘목화마을’을 만들었다. 목동에서 이주한 이들이 화합하는 마을이었다. 시흥에 세 개의 철거민 이주 마을이 순차적으로 건립됐던 것이다. 그때 비로소 ‘임대주택건설촉진법’이 제정됐다.

이어 1986년에는 상계동 판잣집을 강제철거하는 사건이 터졌다. 나와 정 신부뿐만 아니라 수녀들도 철거를 저지하기 위해 모였다. 그때 용역 깡패들은 수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내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들은 수십 대의 트럭을 동원해 철거민들을 남양주와 부천 지역으로 몰아냈다. 이를 계기로 1987년에 ‘서울지역철거민협의회’가 결성됐고, 1989년에 영구임대아파트 제도가 도입됐다. 나는 헌법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국민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생명의 터전을 짓밟는 철거 현장에서 끝없이 되뇌었다.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진다.”(대한민국 헌법 제14조) <계속>


 

김문태 힐라리오(한국평단협 수석부회장, 문학박사)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12-31

관련뉴스

말씀사탕2025. 12. 31

시편 122장 9절
주 우리 하느님의 집을 위하여 너의 행복을 나는 기원하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