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도시 빈민의 대부, 제정구 바오로 - (5·끝) 생명 살리는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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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아이들과 함께한 제정구 의원.
‘천막 사이사이’ 빈민의 동반자
재개발·철거 현장 누비며
‘주거는 생존의 권리’ 목청껏 외쳐
정일우 신부와 막사이사이상 공동 수상
아시아 연대로 빈민 운동 확장
6월 항쟁 주역에서 정치 개혁 기수로
정파 넘어선 ‘함께 사는 정치’ 지향
공공임대주택 확대 법안 등
도시 빈민 정책 마련 힘쏟아
“내가 세상을 닦는 걸레요.”
나는 1980년에 서울대를 졸업했다. 이어 1983년에 서강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하느님 말씀과 교회 가르침을 익혀 지상의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이듬해 속리산 상환암에서 정일우 신부 지도로 33일간 피정할 때였다.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장면을 관상하면서 나도 눈이 열리는 체험을 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에 엄습한 쓸쓸함과 긴장감, 원망과 분노가 윤슬처럼 내려앉았다.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이 보였다. 그들과 연대하여 사회단체를 조직하고, 나아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1984년 8월 사면 복권되자마자 빈민운동의 대표 자격으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중앙위원이 되어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다. 이듬해에는 ‘천주교도시빈민사목협의회’ 회장, ‘천주교빈민문제연구소’ 소장,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의장을 맡아 재개발과 철거 현장을 누볐다. 주거는 생존의 권리라는 사실을 목청껏 외쳤다. 나와 정 신부는 빈민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1986년에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했다. 서울 상계동 철거 지역에 내걸린 ‘빈자천하지대본(貧者天下之大本)’ 옆에 새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환영 제정구·정일우 선생 천막 사이사이상 수상’.
나의 삶을 ‘천막 사이사이’로 표현한 철거민들과 함께 기쁨을 나눴다. 이 상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연대를 통해 빈민운동을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1987년 4월 상계동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이 명동성당 안에서 천막농성을 하는 데에도 힘이 실렸다. 국외에서는 그해 UN이 정한 무주택자의 해를 맞아 ‘세계에서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강제철거를 하는 나라’로 대한민국이 보고됐다. 이듬해에는 태국 방콕에서 ‘민중주거쟁취 아시아연합’이 발족돼 나와 정 신부가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이어 1989년에는 ‘아시아 도시빈민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했다.
정일우 신부 회갑연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과 제정구 의원.
6월 항쟁 주도… 정치활동 본격화
나는 정치가 삶을 관통한다고 여겼다. 맹자가 가르침을 청하는 양혜왕에게 던진 촌철살인의 충언이 그르지 않았다. “부엌에 살진 고기와 마구간에 살진 말이 있는데, 백성들은 굶주리고 들판에 굶어 죽은 시신이 뒹굴고 있습니다. 이는 정치로 백성을 죽여 동물에게 먹이로 던져준 것과 같습니다.”(「맹자」 ‘양혜왕장구’)
맹자는 군주가 정치를 잘못해 백성을 굶어 죽게 한다면 이는 몽둥이나 칼로 죽이는 것과 같다고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민이 평화롭게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위정자의 소임이자 의무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떠했는가. 해방과 좌우익 갈등, 정권의 부정부패와 4·19혁명, 5·16 군사 쿠데타와 철권정치,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국민들은 불의한 정치인들의 비민주적 통치 하에서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1987년 12월 마침내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리라는 희망에 찬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코앞이었다. 현직 대통령은 군사반란의 동료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간접선거를 하고자 했다. 나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서 이의 부당함을 역설하며 6월 항쟁을 주도했다. 결국 신군부 측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다는 6·29 선언을 했다. 그때 야권의 유력한 후보들은 단일화를 하지 못한 채 각자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로 인해 야기된 군사정권의 연장에 실망했다. 역사적 축복을 걷어찬 두 후보에 화가 났다.
이에 뜻있는 이들이 모여 새 정치 모임을 결성했다. 나의 정치 행보에 김수환 추기경과 함석헌 선생, 그리고 아내를 비롯한 지인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신음하는 민족의 역사와 절망에 찬 민중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역사 앞에 올바로 서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되는 길이라 굳게 믿었다. 제때에 올바른 자리에서 죽어 희망을 싹 틔우는 하나의 밀알이 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했다. 죽음에 직면한 예수님이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3)고 했듯이 말이다.
정 신부는 나를 ‘걸래(傑來)’라 부르고는 했다. 걸출하게 온다는 뜻보다는 걸레가 됐다는 의미였다. 자신은 너덜거리고 지저분하지만, 주변을 청결하게 닦는 걸레 말이다. 딱 들어맞는 표현이었다. 하느님의 숨결로 존귀한 생명을 지닌 이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깨끗한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까마귀 노는 골로, 범이 사는 굴로 향했다.
1997년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의 청빈선언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앞줄 왼쪽 네번째)과 제정구 의원.
국회 입성
1988년에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해 공동대표를 맡고, 이어 진보정치연합의 대표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에 나섰다. 하지만 그해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나를 향한 비난과 충고가 빗발쳤지만,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내려놓을 순 없었다. 마침내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경기 시흥·군포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간의 빈민 공동체 운동을 발판 삼아 ‘함께 살아가는 정치’를 펼치고자 했다.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나를 위시한 초선의원 12명이 깨끗한 정치 실천 선언을 했다. 구조적인 부패 사슬을 끊고, 잘못된 정치 문화 풍토에 제동을 걸었다. 아울러 그간의 경험을 살려 재개발 지역 주민들의 권리 보장과 공공성·공익성 강화, 그리고 공공임대주택 확대 법안 등 도시 빈민 정책을 마련하고자 불철주야했다. 내 의원 사무실이 ‘불 꺼지지 않는 방’이라 불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995년 직전 대선에서 낙선한 후보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선언했다. 그러자 민주당 소속 의원 95명 중 65명이 탈당해 신당에 참여했다. 소신 없이 철새처럼 떠돌며 세력을 만들어가는 정치인들이 안타까웠다. 나는 목청을 돋워 외쳤다.
“의미 없는 재선, 삼선 의원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초선의원으로 장렬히 전사하겠소.”
하느님을 향해 우뚝 서는 것이 참 명예심이라는 선포였다. 그런 혼란 속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재선돼 민주당 원내총무에 선출됐다. 그러나 민주당은 15석을 확보하는 데 그쳐 이듬해 신한국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을 창당했다. 당시 민주당 부총재였던 나는 ‘3김청산’을 주창하며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진영과 정파에 얽매이지 않는 소신 있는 정치인이 되고자 했다. 이후 소장파 의원들과 희망을 여는 정치연대를 조직해 정치 개혁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느님이 내게 맡긴 생명을 살리는 희망의 정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깨끗한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의 영원한 벗 제정구 의원의 장례미사가 1999년 2월 12일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봉헌됐으며 유해는 경남 고성 선산에 안장됐다. 고인에게는 11일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됐다.
김수환 추기경 “메마른 땅의 한 줌 소금”
“고요한 밤 거룩한 밤∼”
1998년 성탄절이다. 함께 노래하는 가족, 공동체 식구, 비서진과 지구당 식구 모두의 얼굴에 평화가 넘친다. 앙증맞은 어린이가 내민 선물 포장지를 뜯자 때수건인 이태리타월이 나온다. 깔깔대고 호호거리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나는 폐암 말기의 병색을 감추고 너스레를 떤다.
“앞으로 더 깨끗하게 닦고 다니겠습니다. 걸레 만세!”
세상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불굴의 민주투사, 빈손의 구도자, 도시 빈민 운동가, 생명 정치인?. 나는 대학에 합격한 날, 남보다 뒤진 인생을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자고 결심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1코린 4,11)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자 했다. 하느님과 하나 되는 신앙인, 영적인 깨달음과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을 살고자 했다.
1999년 2월 9일 마침내 하느님 대전으로 간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나를 일컬어 김수환 추기경이 ‘메마른 땅의 한 줌 소금’이라 하고, 김지하 시인이 ‘참된 구도자이자 참된 혁명가’라고 한 추모의 말씀, 그리고 사후에 추서된 국민훈장 모란장이 과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