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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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박해 시기 조운로 따라 이어진 신앙의 길, 초락도공소

[리길재 기자의 공소(公所)를 가다] 6. 대전교구 당진본당 초락도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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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당진본당 초락도공소는 1985년 설립됐다. 초락도공소 전경.

조선 시대 때 세금으로 바치는 곡식을 운송하는 뱃길을 ‘조운로(漕運路)’라 일컫는다. 조선의 조운로는 경상도 남해의 여러 고을에서 출발해 전라도-충청도-경기도 해역을 따라 한양에 이른다. 조선 지리지 「여지도서」에는 충청도 조운로를 ‘당진 원산도-해미 안흥정상구미포-태안 서근포-보령 난지도’로 표기하고 있다. 오늘날 당진 원산도는 충남 보령 오천면 원산도, 안흥정상구미포는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옛 안흥항, 서근포는 태안군 소근진성, 난지도는 당진군 난지도이다.

조운로는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서양 선교사들의 밀입국로로, 또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피난로로, 교우촌 간의 긴급 연락로로 이용됐다. 서해안의 여러 곶 안 마을에 은신처와 교우촌이 들어선 것도 같은 이유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마지막 은신처였던 ‘상괴’와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의 최후 근거지 ‘신리’가 작은 섬들을 끼고 곶 안 깊숙이 들어와 하천 인근에 자리한 까닭도 이와 같다.
서울 명동과 혜화동본당 등 많은 신자의 도움으로 지어진 초락도공소 내부.
벽돌로 마감해 회중석과 구분해 놓은 초락도공소 제단.

박해 시기 선교사들 밀입국로이자 피난로

앵베르 주교의 은신처를 제공한 하느님의 종 손경서(안드레아)와 다블뤼 주교를 자신의 집에 모신 손자선(토마스) 성인이 모두 밀양 손씨 명천공파 일족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손경서는 손자선의 당숙이고, 1868년 한양에서 순교한 손자중(바오로)과 손여회(필립보)·손여일(필립보)은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신리 출신이다. 밀양 손씨 명천공파 조상(파조-派祖)이자 당진 땅에 맨 먼저 정착한 조상(입향조-入鄕祖) 명천공이 당진군 고대면 당진포리에 삶의 자리를 이룬 후 6세손이 신리로 이주해 정착했다. 이들은 대대로 당진 땅에 살면서 어느 누구보다 조운로를 따라 나룻배 한 척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안전하게 몸을 숨기고 또 중국으로 건너갈 수 있는 지리적 입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한 부분을 인용한다.

“앵베르 주교는 자기가 서울에 머물러 있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지방으로 내려가 너그러운 몇몇 신입 교우들이 그를 위하여 마련한 집에 숨었다. 이 탈출을 꾸민 사람은 손경서 안드레아였는데 (?) 1839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 주교를 위하여 자기 비용으로 안전한 피난처를 마련할 생각을 하였다. 오랫동안 수소문한 끝에 묘하게 자리 잡은 장소를 하나 발견하여 이내 그 집을 샀다. 이 작은 마을은 (?) 바다 쪽으로 꽤 깊숙이 뻗어 나간 가느다란 반도의 끝에 있다. 집들은 해안을 끼고 항해하는 배에서 보이지 않았다. 북쪽으로는 골짜기 하나만이 그리로 나 있었지만, 다른 동네에서 하도 멀리 떨어진 곳인 까닭에 말하자면 그리로 해서는 내륙 지방과 아무 연락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안드레아는 또한 주교가 필요한 경우에 도피할 수 있게 하려고 마을 근처에 배 한 척을 매어두는 신중한 조치를 취하였다.”(중권, 423~424쪽)
초락도공소 마당에 있는 성모상.

1956년 17세 소녀 홍순교가 초락도 첫 신자

손자선 성인 일가가 살았던 당진포리에서 서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대호만으로 가다 보면 푸레기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 충남 당진시 석문면 초락1로 143(석문면 초락도리 463-5)에 대전교구 당진본당 초락도공소가 자리하고 있다.

‘푸레기’는 풀이 무성한 섬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초락도(草落島)’는 풀잎 하나가 떨어져 섬을 이루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옛사람들은 이곳에 풀과 물이 많다해서 ‘초호리(艸湖里)’라고 부르기도 했다.

초락도는 이름 그대로 섬이었다. 조선 인조 임금이 반정을 주도한 홍서봉에게 하사한 땅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엔 남양 홍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초락도의 3분의 2나 되는 토지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1970년대 삼봉 제1·2 제방이 쌓이고, 1980년대 대호방조제가 건설돼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벌이 간척돼 논으로 변하면서 육지가 됐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나무배로 섬들과 육지를 오갔는데 이제는 자동차로 어려움 없이 왕래한다. 자연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큰 저수지와 습지, 논과 밭이 생겼다.

「천주교 당진본당사-70주년 기념집」에 따르면, 1956년 당시 17세 소녀였던 홍순교(막달레나)가 초락도 주민으로는 처음으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녀는 배를 타고 섬에서 빠져나와 4㎞를 걸어 삼봉에 도착한 후 차를 타고 당진성당에 가서 가톨릭 교리를 배웠다고 한다. 홍서봉 영의정의 후손인 만큼 뿌리 깊은 유교 집안에서 성장한 그녀는 가톨릭 신앙을 갖는 데 있어 가족의 반대가 매우 컸다고 한다. 특히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세례를 받은 그녀는 집집이 찾아다니며 선교를 했다고 한다. 홍순교는 고향을 떠났다가 1985년 초 교리신학원을 마치고 선교사로 다시 초락도로 돌아왔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해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에 초락도공소가 설립됐다.
성경 이야기를 주제로 꾸며진 초락도공소 창문.
단체 성지 순례는 초락도공소 신자들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벽면 한쪽에 장식된 성지 순례 사진들.

설립 1년 만인 1986년 공소 건물 봉헌

1986년 1월부터 초대 공소 회장 홍성직(바오로)의 집에서 공소 예절과 레지오 마리애를 시작했다. 이때 공소 신자가 성인 16명에 어린이 8명이었다. 홍순교 선교사는 공소 마련을 위해 서울대교구 명동본당 사회복지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명동본당에서 200만 원을 지원받아 공소 회장 집 앞마을 공동작업장 건물을 매입했다. 또 서울 혜화동본당과 당진본당 삼봉공소의 지원을 받아 공소를 꾸몄다. 부족한 건축 기금은 초락도공소 신자들이 모금했다. 이런 중에도 당시 100만 원을 자신보다 더 어려운 공소에 지원하기도 했다. 공소 설립 1년 만에 많은 신자의 도움으로 지은 초락도공소는 1986년 9월 7일 봉헌식을 했다. 초락도공소는 설립 3년 만에 세례자 46명·예비신자 20명 등 선교사 포함 67명의 신자 공동체로 성장했다.

초락도공소는 간척 농지 한가운데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초락도라는 지명이 아니라면 이곳이 밀물과 썰물이 오가고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 드나들던 섬이었다는 사실을 가늠할 수 없다.

초락도공소의 외관은 샌드위치 패널로 다소 차가워 보이나 실내는 온화한 분위기다. 나무 회중석과 색깔을 맞춘 바닥재를 깔아 통일감을 이뤘다. 제단은 벽돌로 마감해 회중석과 자연스럽게 분리해 놓았다. 나무 제대 바로 뒷벽에 십자가상을 두었고, 그 옆으로 예수성심상과 성모상, 성요셉상이 모셔져 있다. 창문은 ‘주님 탄생 예고’ ‘성령 강림’ 등을 주제로 한 색유리 시트지로 꾸며져 있고, 양측 벽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장식돼 있다. 공소 벽면 한쪽에 장식된 ‘성지 순례 사진 액자’는 공소 신자들의 신심을 잔잔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단체 성지 순례는 초락도공소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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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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