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 전례력 안에서라면 특별한 축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사적으로도 눈에 띄는 사건이 드문 시기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 정도가 이즈음에 반복될 뿐 인류 역사 전체로 보아 그리 큰 파동을 일으킨 시절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그리스도 안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때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큰 울림이 쉽게 일지 않는다. 참으로 평범하고 조용한 시간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매일을 특별하게 만드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모든 날이 특별하다면, 사실 아무 날도 특별하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지능을 가진 생명체는 누구나 ‘특별함’을 갈망한다. 강아지는 주인의 눈빛만으로도 유대감을 확인하고, 독립적이고 까칠한 고양이조차 자신을 돌보는 사람을 같은 종이 아닌 ‘특별한 존재’로 인식한다.
하지만 인간은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해가 되고, 결국 삶이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알면서도, 정작 눈앞의 평범한 시간을 귀하게 여기지 못한다. 무료한 오후 한 시간은 소리없이 흘러가지만, 시한부 인생을 사는 이에게 마지막 한 시간은 존재의 모든 의미가 깃든 시간일 것이다. 사람에게는 순식간에 지나가는 하루가, 하루살이에게는 전 생애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평범한 시간을 가장 절묘하게 다루는 예술이 있다. 바로 음악이다. 수많은 생명체가 시간을 느끼지만, 시간을 ‘단위화’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하나의 긴 음을 쪼개어 4분음표·8분음표·16분음표라 이름 붙이고, 그 흐름에 속도를 부여한 것이 템포이며, 강약의 패턴을 더한 것이 박자다. 미술이 공간의 예술이라면, 음악은 절대적인 시간의 예술이다. 우리는 음악을 듣기 시작하는 순간, 그 음악이 지정한 시간 안에 들어가게 된다.
흥미롭게도 현대 음악가들은 이 ‘시간’이라는 틀을 전복하려는 과감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미국의 실험 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는 1952년 전위적 작품 ‘4분 33초’를 발표했다. 악보에는 3악장이 표시되어 있지만, 연주자가 그 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은 딱 하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는 4분 33초 동안 단 한 음도 연주하지 않는다. 음악이 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예술이라면, 케이지는 그 시간을 다시 평범성 속으로 되돌려버린 셈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기묘하다. ‘연주’는 없는데 ‘음악회’는 존재한다. 관객은 침묵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 객석의 숨소리와 작은 잡음을 ‘음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음악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묻는, 20세기 예술의 가장 대담한 질문 중 하나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키릴 페트렌코가 연주한 ‘4분 33초’는 그 상징적 장면을 잘 보여준다.
https://youtu.be/AWVUp12XPpU?si=VzdSBkehNJOZ9TpL
결국 연중 제2주일처럼 별다른 사건이 없는 시간도 우리 삶의 일부이며, 오히려 그 ‘텅 빈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우리의 태도를 결정한다. 케이지가 침묵을 통해 음악을 다시 질문했듯, 평범한 하루 역시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이 평범한 시간을 어떻게 특별하게 만들고 있는가?”
작곡가 류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