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시흥. 지금의 서울 금천구 시흥동·독산동 일대는 판잣집과 무허가 주택이 겹겹이 이어진 도시의 변두리였다. 장마철이면 골목마다 물이 차올랐고, 겨울이면 작은 불씨 하나에 온 동네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노동자 등 가난한 이들과 실향민이 모여들었지만, 국가도, 제도도, 교회도 이들의 삶을 쉽게 품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산동네에, 1975년 2월 1일 사과 궤짝 몇 개와 이불 보따리를 들고 세 명의 젊은 여성이 들어섰다. 책상 대신 궤짝을 놓고, 삶의 현장 한복판에 그대로 몸을 던진 이들. 그들이 걸어 들어간 그 골목 ‘전진상’의 시작이었다.
무작정 산동네에 발을 들인 ‘고운 처자’들은 국제가톨릭형제회(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이하 아피) 회원인 최소희(데레사) 약사, 유송자(데레사) 사회복지사, 벨기에 출신 배현정(마리 헬렌 브라쇠르) 간호사. ‘그 시대의 사람이 되어라(Becoming Being)’라는 아피의 가르침과,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해 6월 7일 전진상 약국이, 10월 25일에는 전진상 복지센터가 문을 열었다. 3년 뒤 김영자(루치아) 간호사가 합류하면서 네 명이 된 이들은 가파른 산동네 골목을 오르내리며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다. 병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고 약을 나누고 아이를 업고 뛰었다.
그렇게 시작된 작은 씨앗은 이후 전진상 의원과 복지관, 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 지역아동센터로 자라났다. 50년이 흐른 지금, 이들은 80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현역이다. 최소희 약사는 약국 원장, 유송자 사회복지사는 복지관 관장, 김영자 간호사는 의원과 복지관의 재정 담당, 의대에 진학해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된 배현정 의사는 의원 원장을 맡고 있다. 네 명이 시흥벌에서 펼쳐온 50년은 한국 사회복지 역사의 살아 있는 증언이기도 하다.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라”
1974년 1월 초, 아피 공동체의 새해미사를 집전한 김수환 추기경은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갔으면 한다”며, “특히 평신도인 아피 회원들이 그곳에서 함께 살며 활동해 달라”는 것이었다.
최소희 원장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마치 마음에 ‘빛’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그 정신을 삶에서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던 때였다. 당시 유송자, 배현정 회원 역시 그 말을 듣고 깊은 울림을 느꼈고,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뜻을 모았다. 김 추기경은 “약사, 사회복지사, 간호사가 함께 있으니 약국을 열고 의료·사회복지 활동을 하면 된다”며 독려했고, 빈민촌 후보지 목록을 건네주었다.
하나하나 지역을 직접 돌아보던 이들은 시흥동에 이르러 말을 잇지 못했다. 배현정 원장은 “그 자체로 정말 충격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미등록 주민을 포함해 약 4만 명이 산동네에 살고 있었지만, 약국과 동네 의원 한 곳이 전부였어요. 아무리 가난해도 이렇게까지 가난할 수 있을까 싶었죠.” 어떤 이는 물조차 없는 판잣집에 살았고, 어떤 이들은 생선 나무 궤짝을 엮어 만든 공간에서 가족과 버텼다. 세 사람의 마음은 ‘여기에 들어와야 한다’로 자연스럽게 모였다.
김 추기경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 지원을 받아 현재 전진상 약국 자리의 2층 집을 구했고, 그곳에서 전진상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전·진·상의 정신 그대로 살아 낸 50년
전진상의 초창기는 시흥의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낸 시간이었다. 온 가족이 폐결핵에 걸려 도움을 청한 집, 연탄가스에 중독된 가족, 폐에 고름이 가득 차 심장이 오른쪽으로 밀릴 만큼 위급했던 학생, 가마니에 덮여 하수구에 놓여 있던 어린아이의 시신까지…. 기억을 꺼내면 하룻밤을 지새울 만큼 많은 사연이 이어졌다.
젊은 여성들이 빈민가에서 살며 일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알코올중독자의 난동과 칼부림, 심지어 조현병 환자가 약국으로 뛰어드는 일도 있었다. 현금이 있는 약국은 가난한 동네에서 언제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김 추기경은 사정을 알고 매우 안타까워했다. ‘고운 처자들이 제복도 보호막도 없이 험난한 생활을 어찌 해 나갈까’ 걱정하면서도, 성직자와 수도자가 하기 힘든 일을 평신도인 아피 회원들이 맡아 준 것에 깊이 감사했다고 한다. 이러저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심란했을 순간이 많을 법도 하다. 접고 싶을 때는 없었을까.
“온전한 자아봉헌, 참다운 사랑, 끊임없는 기쁨인, 아피의 전.진.상(全眞常) 영성에 따른 우리의 소명이자 사명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한 번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최소희 원장의 말에 유송자 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나를 위한 일이 아니었어요. 정말 그리스도의 사업에 동참한다는 마음이었죠. 인간적으로 힘들다고 느낀 적은 있어도, 근본적으로 일을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었죠.”
김영자 간호사는 “건강이 많이 안 좋아서 모든 게 더 어렵게 느껴진 적도 있었지만, 공동체가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웃과 함께 삶을 나눈 것, 그것이 전진상”
전진상 공동체 50년의 의미에 대해 언니들은 한목소리로 “이웃과 함께 살며 아픔과 삶을 나눈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도 각자 상처와 어려움이 있지만, 나를 닮은 이웃, 소외되고 병든 이웃과 함께 살며 그 아픔을 함께한 시간이 뜻깊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은 “전진상이라는 이름 아래 누구나 형제였고, 모두가 내 가족이라는 마음으로 살아 왔다”며 “또 이곳에 오는 사람들도 ‘내 집’, ‘내 형제’를 만난 마음으로 거쳐 갈 수 있기를 여전히 희망하고 있다”고 했다.
전진상이 자신들에게 어떤 곳이었는지를 묻자, ‘인생’, ‘영적·정신적으로 성장시켜 주고 큰 가족을 만들어 준 곳’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50년을 꾸준히 같은 뜻을 가지고 열심히 살 수 있는 이들을 만났다는 게 감사해요. 그리고 사람들이 전진상을 떠올릴 때 ‘그들은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며 살았다’고 말해주면 좋겠어요.”
이들의 손길이 닿은 전진상 복지관과 산하 5개 기관은 지금도 지역 사회 안에서 전인적인 돌봄을 이어가고 있다. 저소득층에게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말기 암 환자가 가정에서 편안히 임종을 맞이할 수 있도록 호스피스 돌봄도 한다.
의료 상담뿐 아니라 가족 문제에 대한 종합 상담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고, 결손가정 아동과 비행 청소년을 예방하는 데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저소득층 아동에게는 전인 교육과 학습 공간을 제공하고, 장학금 지원을 통해 안정적인 성장을 응원하고 있다.
교사와 간호사, 의사, 사회복지사,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들이 함께하며 계층 간의 벽을 허물고 서로 돌보는 공동체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전진상의 뜻을 이어갈 사람들
요즘 이들의 마음속에 가장 큰 고민은 전진상의 뜻을 함께 이어갈 사람들이다. 언니들 가운데 막내인 80세의 배현정 원장은 전진상의원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갈 의사를 찾고 있다.
“전진상 의원은 일반 병원의 외래 진료보다 훨씬 어려워요. 환자를 전체적으로, 포괄적으로 바라봐야 하거든요. 가정의학과 진료는 물론이고, 40년 넘게 이어져 온 방문 재택 진료도 함께해야 하죠. 최근 기대했던 의사 선생님도 ‘왕진’이 부담스럽다며 결국 오지 않으셨어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인터뷰 현장. 80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네 명의 언니들은 힘차고 밝았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더 젊어지는 것 같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든든한 언니들이다.
이들은 전진상을 아끼고 함께해 준 의료 봉사자와 후원자, 자원봉사자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전진상이 ‘그 시대의 사람이 되어라’는 정신 안에서 앞으로도 따뜻한 사람이 사는 곳, 누구나 편히 머물 수 있는 곳,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공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시흥동에서의 반세기를 넘어선 지금, ‘못 말리는 유쾌한 언니들’이라 불리는 네 사람은 여전히 사람들 곁에서 웃음으로 문을 연다. 그 웃음 안에는 기도와 눈물, 그리고 흔들림 없는 선택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상담 및 문의 02-802-9313 전진상 의원·복지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