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문학을 통한 사도적 삶,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 - (2) 한 말씀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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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와 함께 자택에서. 두 사람은 1988년 박완서 작가가 가족을 연이어 잃고 슬픔에 빠져있을 때 친분을 쌓아 더 가깝게 지냈다. 14살의 나이 차에도 자매처럼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위로와 정을 나누었다. 한영희 작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묻고 또 묻고
‘나에게 일어나선 안 되는 법 있나’
한 수녀와의 대화로 자기 성찰
계시와도 같던 깨달음 ‘나눔’
억지로 먹은 음식 모두 게워내고
변기 앞에 무릎 꿇고 있다 든 생각
‘아무것도 남과 나눠본 적 없구나’
‘여기까지 왔으니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남편도 잃고 아들도 잃어야 했냔 말입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는 다 뜻이 있다고 했으니 분명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제발 알려주십시오.’
이해인 수녀의 제안대로 수녀원에 올 때 박완서는 결심했다. 반드시 그분의 음성을 듣고야 말리라. 부산으로 내려와 딸 부부 내외가 아무리 살뜰히 보살펴줬어도 몸도 마음도 편치 않았다. 울고 싶을 때 마음껏 목놓아 울지 못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삼키는 일도 고역이었다. 잃은 자식 때문에 곁에 있는 또 다른 자식을 걱정케 하는 것 역시 어미로서 할 일이 못 되었다.
수녀원에서는 눈물이 나면 울고 마음껏 주님을 원망할 것이다. 그래서 이 고통의 원인을 밝혀내겠노라 박완서는 마음먹었다. 북적한 광안리 해변의 번화가를 지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 들어서자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에 온 것 같았다. 고작 길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바깥 세상과 이렇게나 다를 수가 있다니! 박완서는 안내에 따라 수녀원의 손님 방인 ‘언덕방’으로 향했다.
이해인 수녀의 초대로 박완서 작가가 머물렀던 부산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 수녀원 제공
내게 왜 이런 시련이 닥치면 안 되는 것일까
경건하면서도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 수녀원의 일과에 따라 박완서 역시 기도하고 산책하고 묵상을 이어갔다. 때로 수녀들과 활기 넘치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하는 물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살면서 나쁜 짓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모르고 저지른 적은 있을지 몰라도 일부러 남을 함부로 대한 일도 없었다. 이만하면 착실하게 잘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삶이었다고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니 참척이라는 벌을 받을 까닭도 애초에 없는 것이었다.
한 수녀와의 대화는 이런 박완서의 생각에 작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수녀에게는 말썽꾸러기 동생이 있어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 수녀는 ‘내 동생이 왜 저래야 하나’ 항상 원망만 하다 ‘왜 내 동생이라고 해서 저러면 안 되나’라고 생각을 고쳐먹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동생과의 관계도 호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가?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각이다. 내가 뭐라고, 얼마나 잘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선 안 되는 법이 있는가 말이다. 이 대화 이후 박완서는 조금씩 생각을 바꿔 원망보다는 스스로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왜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때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와 함께 자택에서. 두 사람은 1988년 박완서 작가가 가족을 연이어 잃고 슬픔에 빠져있을 때 친분을 쌓아 더 가깝게 지냈다. 14살의 나이 차에도 자매처럼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위로와 정을 나누었다. 한영희 작가
주님의 음성은 침묵으로 오신다
수녀원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냈을까. 어느 날 온전히 혼자가 되어 ‘언덕방’에서 박완서는 주님을 기다렸다. 기다림으로 시작한 기도는 어느새 통곡으로 이어졌다. 통곡은 이내 원망 섞인 몸부림이 되었다. 처절한 밤이 몇 번이나 지났지만 어떠한 계시도, 말씀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그는 제대로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했다. 자식을 잡아먹은 어미라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일까. 마치 이대로 죽을 준비라도 하는 듯이 몸에서 음식을 거부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음식을 먹지 못하자 두 발이 땅 위에 붕 뜬 것처럼 몸이 가벼워졌다. 정신은 갈수록 명료해졌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억지로 먹은 점심을 모두 게워내고 변기통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을 때 문득 계시와도 같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이제껏 아무것도 남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물질이나 사랑 그 어떤 것도 이웃이라 부를 수 있는 타인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지은 큰 죄였구나!’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은,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이야말로 큰 죄였음을,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꿇은 자세로 깨치게 되었다. 고통마저도 나눌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나누는 것이 맞았다.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력과 지력과 모든 의지와 내게 있는 것과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소서. 나의 고통까지도, 당신이 내게 이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 의향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내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이것이 내게 족하나이다.”(「한 말씀만 하소서」 중에서)
계시와도 같던 깨달음을 얻던 그 밤, 박완서는 감미로운 잠에 빠져들었다.
민들레 영토 30주년 축사. 2005년 이해인 수녀의 시집 「민들레영토」 출간 30주년 행사에서 축하 편지를 낭독하는 박완서 작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제공
밥이 되어 내 안에 오신 주님
평소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시간에 맞춰 수녀들과 시간전례(성무일도)를 바치고 있던 박완서는 어디선가 홀연히 느껴지는 된장국 냄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잊고 있던 허기가 강렬하게 몰려왔다.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창피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은 어쩌면 환각이었는지, 점심 메뉴는 된장국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맛깔스러워 보이는 비빔밥이었다. 그는 짐승 같은 식욕을 느끼며 밥을 비벼 싹싹 긁어먹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토록 오랫동안 곡기를 끊은 상태였다면 밥을 먹은 즉시 탈이 나는 게 정상이다. 우걱우걱 밥을 먹으면서도 걱정스러웠던 일이다. 그런데 오후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매일 식사를 해왔던 사람처럼 속이 편안했다. 다음 끼니 시간이 되자 거짓말같이 식욕이 살아났다. 그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곡기를 끊고 싶어 하는 마음과 식욕을 느끼는 육신의 싸움이 벌어졌다. 마치 광야의 악마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너는 이제 살고 싶으냐?’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스스로가 한없이 창피하고 슬퍼졌다. 입으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만 되뇌었다. 수녀원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온 박완서는 가족의 장례미사를 치러준 본당 주임 신부를 찾아갔다. 상중에 못다 한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때 사제관 응접실에서 그의 눈에 띈 것이 있었으니, 탁자 위에 놓인 도자기였다.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밥이 되어라’
이는 곧 밥을 짓는 행위처럼 다른 이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헌신하라는 김수환 추기경의 생전 가르침이 담긴 문장이다. 박완서는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맡았던 가장 달콤했던 밥 냄새를 떠올렸다. 어쩌면 주님이 그때 밥이 되어 내 안에 오셨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도자기에 적힌 바로 이 말씀처럼 말이다. 절규하듯 토해낸 물음에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던 주님은 사실은 계속 말씀을 하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독선과 아집으로 스스로 귀를 막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자신을 돌아본다.
‘그렇다, 하도 답답해서 몸소 밥이 되어 찾아오셨던 것이야. 우선 먹고 살라는 응답으로.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지경에서 밥 냄새가 그토록 감미로울 수 있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