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첫 영세자로서 초대교회 신앙공동체를 이끄는 데 헌신했던 하느님의 종 이승훈(베드로). 몇 차례 체포와 유배 끝에 순교까지 했던 그의 정신을 뿌리로 조선교회는 사제 없이 평신도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약 100년간 1만 명 넘는 순교자를 배출했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한 이승훈은 인천 장수동(반주골) 산135번지(남동구 무네미로 143) 소재 선산에 묻혔다. 그 순교 공적을 기리고자, 인천교구와 인천시는 이승훈 묘역(인천시 기념물 제63호)을 중심으로 약 5만㎡ 대지에 역사공원과 기념관을 갖춘 ‘이승훈 베드로 성지’를 조성했다. 선교사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조선교회 근원을 간직한 성지를 찾았다.
‘월락재천, 수상지진(月落在天, 水上池盡)’
인천 만수역에서 인천대공원역에 이르는 ‘이승훈베드로길’ 끝에 사방으로 트인 공터가 나타난다. 4단으로 된 피에타 연못과 정원이 입구에서 순례객을 반긴다. 4대에 걸쳐 아들 이신규(마티아), 손자 이재의(토마스) 등 8명 순교자를 배출한 이승훈 집안의 순교 내력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연못을 지나 펼쳐지는 ‘이승훈 베드로 광장’ 잔디밭 너머에는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 원형 건물 ‘이승훈베드로성지기념관’이 있다. 이승훈 순교 정신을 기리고 순교 신앙을 체험할 수 있는, 신앙과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이다.
기념관 오른편 벽에는 이승훈이 참수형을 앞두고 남긴 신앙 고백문 ‘월락재천, 수상지진(月落在天, 水上池盡)’이 붙어 있다. “달은 비록 지더라도 하늘에 남아 있듯이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대로 남아 있고, 물이 솟구치더라도 연못에서 다하는 것 같이 내 신앙은 결국 천주 안에서 다한다”는 뜻이다.
건물과 중앙 광장도 달(月)과 연못(池)을 형상화해 원형으로 조성됐다. 공터에 깊이 스미는 자연광은 어둠 속에 빛이신 주님을 찾던 선조들의 믿음을 엿보게 한다. 과시보다 절제, 설명보다 체험의 의미를 살리고자 빛과 그림자, 단단한 재료(석재)와 비어 있는 공간의 대비를 강조했다.
기념관 2층 상설 전시실은 이승훈이 최초의 세례자이자 조선교회의 반석, 순교자라는 역사적 사실을 넘어 인간적 고뇌, 대를 이은 후손들의 순교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을 소개한다. 이승훈을 통해 전해진 초기 신앙자료들, 그가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가성직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사제 파견을 요청하며 보냈던 서한 등 다양한 사료도 전시돼 있다. 을사추조적발사건, 정미반회사건, 진산사건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상황에서 이승훈이 겪었던 갈등과 고뇌, 그리고 신유년(1801년)에 순교함으로써 신앙을 증거했던 진정성을 들여다볼 수 있다.
영상 전시실은 그의 삶을 소개하는 영상과 평화로운 분위기의 대형 영상도 상영돼 순례객이 잠시 머물며 묵상하기에도 좋다. 입구에는 이승훈이 북경 북당성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받는 장면을 재현한 포토존이 있다. 순교자를 따르는 순례자는 오늘 잠시 이승훈이 되어 찰칵, 추억 한 컷을 남긴다.
평신도에 의해 태동한 조선교회를 묵상하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평신도들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여 세운 조선교회. 자발적 복음화의 근원을 품은 성지라는 점에서 이승훈 베드로 성지는 의미가 크다.
1층 경당 제대 뒤쪽 벽에는 루카복음 18장부터 24장까지의 말씀이 적혀 있다. 대리석 위 오목새김(陰刻)된 글자마다 색유리 조각이 수 놓여 경건하고도 차분하다. 한국교회 최초로 번역된 성경이 루카복음이라는 의미와, 평신도로서 조선교회 창설 주역이었던 이승훈의 공통점에 착안한 디자인이다. 벽 오른편에 유리 조각 45개로 만들어진 감실은 45세 나이로 순교한 이승훈의 의지를 형상화했다.
신자석 오른쪽 벽에 걸린 십자가의 길 유리공예 작품은 유리 3장 안에 주님 수난과 조선교회 평신도 순교 정신을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를 상징하는 노란 선과 오상(五傷)을 상징하는 빨간 점들 사이로, 평신도들에 의해 조선교회 신앙의 꽃이 피었음을 상징하는 초록색 점이 수 놓여 있다.
기념관 뒤 산속에는 이승훈과 두 아들의 묘소까지 이르는 400m 십자가의 길이 목재 데크로 조성돼 있다. 설명보다 침묵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묵상의 길…. 신앙을 증거한 한 사람의 선택이 한 가정, 더 나아가 한 교회의 역사가 되었음을 깊이 느끼게 한다.
전시실, 묵상 공간, 경당, 산속 순례길이 이어진 성지는 순례자가 ‘역사에서 신앙으로’, ‘지식에서 묵상으로’ 나아가도록 돕는다. 이승훈 묘역 성지개발 담당 겸 대외협력위원장 정광웅 신부(마르코·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위원장)는 “이승훈의 삶이 바로 우리 신앙인 각자의 삶”이라며,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주시는 주님의 따뜻함을 전해주는 성지를 지향하고 있다”고 전했다.
안내·해설 봉사자 박명숙(엘리사벳·인천교구 부평2동본당) 씨는 “역사공원과 기념관을 둘러본 후 산속을 거니는 십자가의 길 여정을 통해 ‘내 신앙은 어디에서 시작됐으며 나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가’라는 묵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념관은 경당 내 추모의 벽과 기도의 벽, 후원자의 방, 십자가의 길 14처에 후원자 이름과 세례명을 기록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