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번 세계청년대회 치른 폴란드
국민 97가 가톨릭 신자이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모국
잦은 침략·이데올로기 격변에도
유럽 가톨릭의 영적 보루 역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78년 교황으로 선출된 뒤, 이듬해 조국인 폴란드를 찾았다. 교황이 1979년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쳉스토호바의 야스나 고라 수도원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수많은 폴란드인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OSV
가톨릭 신자들이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있는 나치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밖에서 무릎 꿇고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OSV
폴란드 교회 크라쿠프대교구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는 은밀한 공간이 있다. 수도원 건물 한 켠의 쪽문을 지나 벽돌 사이로 난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아늑한 다락방 같은 공간이 나타난다. 청년들 사이에서 ‘지하 교회’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곳은 수도회 학술 사목 공동체 ‘베츠카’의 보금자리다.
‘종교 자유 시대에 웬 다락방 공동체람?’ 할 수 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늘 젊은이들의 숨결로 가득하다. 폴란드어 베츠카는 우리말로 ‘통나무’라는 뜻으로, 이들은 ‘통나무로 만든 통’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의 쌀통처럼 집 안에서 가장 귀한 것을 담는 물건이란 뜻이다. 말 그대로 베츠카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가장 귀한 삶과 영성을 이곳에서 나누고 담아내는 곳이다. 베츠카는 크라쿠프 지역 여러 대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교구 젊은이들의 아지트가 되어 젊은이들의 영적 성장을 돕고 있다.
2025년 12월 12일 베츠카의 아지트는 젊은이들의 활기로 북적였다. 바로 다음날 있을 자선 행사 ‘케이크로 케이크를’을 위해서다. 수도원 복도를 분주히 다니며 물건을 옮기는 청년들이 있는가 하면, 아지트에서는 젊은이들이 행사 때 직접 판매할 쿠키가 먹음직스럽게 하나씩 포장되고 있었다. 수도원 한편으로는 어린아이들의 공간도 보였다. ‘지하 교회’가 아니라, 가장 빛나는 교회인 셈이다.
청년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행사 현장은 정성스럽게 꾸며졌다. 이처럼 활발히 활동하는 핵심 청년들만 60여 명에 이른다. 전체 회원 수를 다 합치면 400명이 넘는 지역 청년들이 베츠카에서 문화·철학 모임, 미사, 공동 기도와 성체 조배, 여행, 행사 등 다양한 사도직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베츠카 대외협력 담당 마르티나 와베르스카(24)씨는 “많은 젊은이가 베츠카에 와 가톨릭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역량을 펼칠 자리를 발견한다”면서 “그 역사만 60년이 넘었다”고 소개했다. 베츠카는 1964년, 당시 교구장이었던 카롤 보이티와 대주교의 요청으로 설립됐다. 바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다.
훗날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WYD)를 제정해 ‘젊은이들의 교황’으로 불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이미 주교 시절부터 쌀알처럼 통나무통에 꽉 찬 젊은이들의 영성을 담고 있었다니. 오히려 폴란드 교회의 베츠카가 WYD를 낳은 작은 모체(母體)가 아닐까.
2027 서울 WYD를 향한 여정에서 역대 WYD 개최지를 찾아 그 열매를 조명하는 cpb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과 2027 서울 WYD 조직위원회 공동기획 ‘개최지를 가다’. 폴란드 교회 첫 번째 편에서는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고향 바도비체와 WYD 본대회가 열렸던 크라쿠프를 찾았다.
1945년 폴란드가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된 이후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소련 군의관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진찰하고 있다. OSV
폴란드 교회 크라쿠프대교구의 주교좌 성 스타니수아프와 바츨라프의 바실리카.
체제에 맞섰던 사제, 젊은이들의 교황이 되다
“18살 때 2016 크라쿠프 WYD에 참여했어요. 제 아버지는 폴란드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진 직후인 1991 쳉스토호바 WYD에 참가하셨죠. 아버지가 곧 저의 WYD 선배이십니다. 제가 25년 만에 다시 폴란드에서 열린 WYD에 참가하기 위해 집을 나서던 날, 아버지는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WYD 대물림, 신앙의 대물림 아닐까요?”
베츠카의 회장을 지낸 안나 미칼-추요바(27)씨는 슬로바키아 출신이다. 2016 크라쿠프 WYD 참가를 계기로 2년 뒤 폴란드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현재 야기엘론스키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폴란드 유학 결정 배경에 “WYD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대한 존경이 있었다”고 밝혔다.
“WYD를 다녀오고 나서, 트램을 기다리고 있던 때였어요. 트램에 한 광고가 붙어있었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당신도 여기서 공부해보세요!’ 그땐 광고 표현이 너무 웃겨서 크게 웃고 말았습니다. 그랬던 제가 폴란드에 정착해 공부하고,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했죠. 그 과정에선 큰 결단이 필요했지만, 제 삶을 이렇게 전환시켜준 것은 WYD였습니다. WYD는 젊은이에게 분명 다양한 가능성을 선사하는 대회입니다.”
폴란드는 국민의 97가 가톨릭 신자인 가톨릭 국가다. 그러나 동·서 유럽을 연결하는 중앙에 위치해 지정학적 이유로 외국으로부터 잦은 침략을 받았다. 18세기 말 세 차례에 걸친 분할로 국가는 지도에서 사라졌고, 20세기에는 나치 독일과 소련의 침공을 동시에 겪었다. 이렇게 폴란드는 반복해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나라였다. 특히 이 시기 폴란드는 ‘전쟁의 피해국’인 동시에 ‘홀로코스트의 현장’이었다. 이때 희생된 이들만 약 600만 명. 당시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이후에는 소련의 조작 선거로 강제로 공산주의 체제를 겪어야 했다.
폴란드 국민은 지난한 고통의 역사 속에서 정체성과 존엄을 지켜줄 유일한 곳인 교회와 신앙에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 현존을 목격하고 그분이 전한 ‘자비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확산한 성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와 아우슈비츠에서 다른 수감자 대신 처형받은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 WYD를 제정해 전 세계 젊은이에게 자비의 메시지를 전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까지. 교회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들이 나온 곳이 ‘자비의 나라’ 폴란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나라’를 실감케하듯 바도비체와 크라쿠프 구석구석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를 공경하는 흔적이 자리하고 있다. 그가 크라쿠프대교구장일 때 폴란드는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기를 맞았다. 1947년 소련에 의한 부정선거로 출범한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1989년 자유 총선으로 붕괴한 것이다.
1978년 즉위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듬해 고국을 찾았고, 그가 주례한 바르샤바 도심에서 열린 야외미사에는 수백만의 폴란드인이 모여 교황에 대한 지지와 애정을 드러냈다. 교구 주교 시절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공산주의를 향한 대표적 반체제 인사였다. 교황은 폴란드 민주화 혁명의 투사로 불렸던 레흐 바웬사와 그가 조직한 자유노조 ‘연대’에 무한한 지지를 보냈다. 1981년 바티칸에서 이뤄진 교황과 바웬사의 만남은 폴란드 국민이 희망을 되찾고 투쟁을 지속할 수 있는 강력한 원동력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1989년 공산주의는 붕괴했다. 시간이 흘러 세간에서는 이를 “가톨릭교회가 공산주의를 이겼다”고 평가한다. 실제 소련의 개혁과 개방을 주도한 마지막 지도자 미하엘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체제 붕괴 이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아니었다면, 폴란드에 민주화 바람은 전혀 불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젊은이들의 신앙 반창고 WYD
공산주의 해체 후 민주주의가 도래하고 난 불과 2년 뒤, 오랫동안 세계와 단절돼 있던 폴란드 젊은이들은 비로소 보편 교회와 만났다. 바로 ‘1991 쳉스토호바 WYD’를 통해서다. 폴란드의 오랜 아픔과 고통을 하느님 자비로 치유받고, 또 서로 위로를 전하고자 전 세계 젊은이가 기다렸다는 듯 쳉스토호바 WYD를 찾아 기쁨을 나눴다. 폴란드의 해방과 진정한 하느님 평화의 가치가 전해진 대회였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성령을 받았습니다.”(로마 8,15) 쳉스토호바 WYD 주제 성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직접 택했다. 그는 WYD가 열리기 1년 전 발표한 제6회 세계 청년의 날 메시지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한계를 지닌 존재이자 때로는 죄인이기까지 한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 불린다는 이 놀라운 초대 앞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을 마주하게 됩니다.”
폴란드 교회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화. 가톨릭평화신문DB
교황은 이어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화(블랙 마돈나) 앞에 마음으로 무릎을 꿇는다”면서 젊은이들을 위해 전구기도를 바쳤다.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화는 나치 점령과 유다인 학살, 공산주의 체제라는 아픈 역사 속에서 폴란드 국민에게 ‘희망’이 되어 준 상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인구의 5분의 1을 잃고, 나치 독일과 소련에 의해 국가가 분할됐으며, 소련의 영향 아래 공산주의 체제를 강요받아야 했던 폴란드인들. 비로소 민주주의를 되찾아 자유를 맞이한 이들의 마음에 교황은 하느님 자비가 전 세계 젊은이에게 전해지는 WYD라는 ‘신앙의 반창고’를 붙여줬다. 그 이름은 다름 아닌 ‘희망’이었다.
진정한 자유 자비
“자유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1991 쳉스토호바 WYD가 상처 입은 민족에게 붙여준 ‘신앙의 반창고’였다면, 2016년 크라쿠프 WYD는 자유를 얻은 이후 교회가 던진 또 하나의 질문이었다. 2015년 11월 프랑스 파리의 극장 바타클랑 테러 사망자 130명, 2016년 3월 유럽연합(EU)의 심장인 벨기에 브뤼셀 폭탄 테러 사망자 32명, 그해 7월 프랑스 혁명 기념일 군중을 향한 트럭 테러 사망자 86명?. 자유는 되찾았지만, 보복의 악순환과 ‘어디도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유럽 전역에 확산했다. 축제조차 공격의 대상이 됐고, 시리아 내전 등으로 수백만 명이 유럽으로 유입돼 국경 봉쇄·혐오·극우 정치 세력의 성장 속에서 난민 위기와 함께 ‘연대의 붕괴’가 화두로 떠올랐다. 특히 이슬람국가(ISIS)의 테러가 국제화되면서 종교에 대한 반발도 날로 높아지고 있었다.
이때 가톨릭교회는 “종교는 폭력이 아니라 자비로 증명된다”고 답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바로 ‘2016 크라쿠프 WYD’의 주제성구다. 보편 교회는 이와 함께 2016년을 ‘자비의 해’로 선포했다.
크라쿠프 WYD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낸 시들체교구 보좌 그제고르즈 수초돌스키 주교는 본지와의 만남에서 “폴란드 교회에서 WYD가 두 번이나 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폴란드 젊은이들의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면서 “2011 마드리드 WYD에서 폴란드 젊은이들은 주교들에게, 특별히 당시 크라쿠프대교구장이었던 스타니스와프 지비시 추기경에게 다시 한 번 폴란드 교회에서 WYD를 개최할 수 있는지 물었다”고 뒷이야기를 전했다.
두 달 후 지비시 추기경은 베네딕토 16세 교황을 만나 2016년 WYD를 크라쿠프에서 개최하면 어떻겠느냐고 정중히 청했다. 수초돌스키 주교는 “교황님께서는 지비시 추기경의 요청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2013 리우데자네이루 WYD 파견미사에서 다음 대회가 크라쿠프에서 열릴 것임을 공식 발표하셨다”고 설명했다.
당시 크라쿠프 WYD 조직위원회의 제일 중요한 문제는 ‘안전’이었다. 수초돌스키 주교는 “그 시기 유럽은 매우 불안정했다”며 “테러 공격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조직위는 정부와 보안 기관·경찰·군과 긴밀히 협력해 WYD 참가자들이 신속히 대피할 수 있는 안전하고 개방적인 장소를 찾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다. 온갖 위험에도 대회를 개최하고자 했던 것은 폴란드 젊은이들이었고, 교회는 성심성의껏 그에 응답했다. 그렇게 마련한 대피소 이름이 ‘자비의 캠퍼스’였다.
수초돌스키 주교는 “많은 젊은이가 길을 잃고 죄와 상처, 왜곡된 관계라는 자신만의 ‘거품’ 안에 갇혀 있는 현실에서 당시 ‘자비’에 대한 교회 메시지는 큰 희망이 되었다”며 “교구대회와 WYD 본대회 동안 폴란드 전역은 하나의 ‘자비의 캠퍼스’가 되었다”고 말했다.
2016년은 폴란드 교회의 복음화 1050주년이기도 했다. 폴란드 국민이 세례를 받은 지 1050년을 맞았던 것이다. 수초돌스키 주교는 “그해 교황님을 초대할 수 있었던 것은 폴란드인 모두에게도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릴 기회가 됐다”며 “이는 폴란드인 전체를 통해 흘러온 하느님의 자비라는 위대한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렇게 크라쿠프 WYD는 국민 전체를 치유해준 시간이었다.
폴란드 자비의 성모 수녀원 내 성당에 ‘하느님의 자비 성화’ 원본이 걸려 있다.
하느님의 자비 성화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가 폴란드인에게 ‘고난을 함께 견딘 어머니’였다면, 크라쿠프 WYD에는 ‘하느님의 자비 성화’가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상처 이후의 얼굴, 하느님의 자비인 것이다.
2025년 12월 13일 크라쿠프 와기에브니키에 자리한 ‘자비의 성모 수녀원’의 이른 아침은 아직 순례자들의 발길을 기다리느라 한적했다. 이곳은 성 파우스티나 수녀가 생전 280여 회에 이르는 예수님 환시와 기적 계시를 체험한 자비의 성지다. 곧 오후 3시가 되면 기도를 바치러 오는 순례자들로 가득 메워질 터였다. 하느님의 자비 성화가 걸린 수녀원 내 성당에서는 매일 이 시간 성화 원본 앞에서 ‘하느님의 자비 기도’가 봉헌되고 있다. 수녀원이 온라인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하는 기도 중계 때엔 최대 3만여 명이 접속한다.
이른 아침인데도 성당에는 이내 서너 명의 순례자가 무릎을 꿇고 ‘하느님의 자비 성화’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자, 나를 보라. 이것이 나의 모습이다. 이 모습대로 나를 그려라.” 성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드러난 예수님은 마치 우리를 향해 걸음을 내디디시는 것 같았다. 수녀회 대변인 가우디아 스카스 수녀는 성화에서 나타나는 예수님 모습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신다”며 “우리는 오직 그분의 사랑에 응답할 뿐 사랑을 얻어내고자 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성 파우스티나 수녀님 일기에는 심지어 죄인일지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끊임없이 찾아다니신다는 사실이 여러 번 언급돼 있다”며 “그분의 사랑은 이 세상 가장 어두운 거리 모퉁이까지 닿는다”고 강조했다.
스카스 수녀는 궁극적으로 자비의 메시지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이라는 매우 고통스러운 시기에 폴란드에 주어졌다”고 전했다. 역사상 폴란드인이 가장 고통받았던 시기,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그저 나를 믿고 따르라. 내가 너를 이 고통의 시간을 지나 부활의 새로운 아침까지 인도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스카스 수녀는 “폴란드인은 희망을 잃지 않고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보다 ‘용서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그분께 오신 자비의 메시지를 들을 필요가 있었다”면서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이 폴란드에서 탈출하고 다른 나라로 피난 가던 시기 작게 만든 하느님의 자비 성화나 관련 기도문을 챙겨 나가면서 ‘자비의 메시지’가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다”고 말 했다.
실제 폴란드는 자비를 삶으로 살아내 성인이 된 인물이 여럿 있다. 성 파우스티나 수녀를 비롯해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바로 그들이다. 성 콜베 신부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유다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갇혔다가 목숨을 잃었다. 당시 나치는 수감자 한 명이 탈출하면 그 벌로 열 명을 처형했다. 처형 대상자 가족이 처절하게 울부짖는 모습을 본 성 콜베 신부는 자원해서 그를 대신해 죽겠다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에 다른 아홉 명과 함께 지하 감옥에서 아사형에 처해져 고통받다가 결국 독극물 주사를 맞고 선종했다. 세계 젊은이들은 폴란드에서 열린 두 차례의 WYD에서 이 성인들의 거룩한 모습을 깨우쳤다.
“나는 어려운 일들이 올 것이라는 사실, 고통은 끝나지 않았으며 우리가 살아있는 한 계속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것, 세 번째 천 년을 위한 빛의 등대로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처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반복해서 전 세계 젊은이에게 전한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사실 예수님께서 성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그분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곧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이었다.
스카스 수녀는 “제3차 세계대전은 결코 오지 않을 수도, 어쩌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불안정하고 인간 존엄성이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 우리는 더욱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남긴 메시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 편에서는 이 자비가 오늘날 폴란드 교회와 청년들의 ‘선택’이자 ‘행동’이 된 순간들을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