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마루공소는 당진본당 관할 정미면 6개 공소가 통폐합돼 설립된 공소다. 돌마루공소 전경. 승효상 건축가가 노출콘크리트로 설계해 지었으나 신자들의 필요와 편의에 의해 많이 변형되었다.
제단 뒷벽 ‘빛의 기둥’. 세로로 가로지른 여백의 공간에 채워진 빛이 하느님과 인간을 하나로 이어주는 듯하다.
새 본당 설립 꿈꾸며 6개 공소 통폐합
대전교구 당진본당 돌마루공소는 기존 여러 공소를 통합해 1996년 11월에 새로이 설립한 신앙 공동체다. 공소를 통폐합할 경우 그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소에 교세가 작은 공소를 병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돌마루공소는 이러한 관례를 깨고 새로운 부지에 새 건물을 지은 후 주변 공소 신자들이 연합해 운용하는 독특한 사례다.
충남 당진시 정미면 충장로 7-66에 자리한 돌마루공소 건물은 웬만한 성당 규모다. 돌마루는 뒷산에 마루 모양의 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방형의 공소와 낮은 담에 장식된 벽화, 장미 뜰에 모셔진 성모상, 예수 성심상, 뒷산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 14처 등이 있다. 국도에서 약 600m 정도 논길을 따라 들어가면 야트막한 밤나무산 아래 흰색 건물로 눈에 확 띈다.
돌마루는 이곳저곳에 흩어져 신앙생활을 하던 많은 신자의 기도로 탄생한 공소다. 1990년대 들어 한국 교회는 지방 공동화 현상으로 많은 공소가 통폐합을 하던 때이다. 당진본당 역시 정미면에 있던 마중·산성·사성·도산·천이·봉성공소의 신자 수가 점차 줄고, 도로망도 좋아져 통합이 필요했다. 정미면 6개 공소 신자들 역시 공감해 정미면 소재지 초입에 위치한 돌마루에 새 공소를 설립하고 하나로 합치기로 한 것이다.
1990년대 당진은 한보철강·당진화력발전소 등 주요 산업시설들이 들어오기 시작해 많은 인구 유입이 기대됐다. 그래서 대전교구도 이 지역 새 본당 설립을 신중하게 검토했다. 이에 당진본당은 보좌 신부 3명을 청해 1명은 본당 사목을 맡고, 2명은 공소에 파견돼 새 본당으로 발전할 기반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구상 아래 제14대 당진본당 주임 정호영 신부가 1994년 승효상 건축가에게 의뢰해 돌마루공소 건물 공사를 시작해 본당 성당 규모의 공소 건물을 지어 1996년 11월 14일 당시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 주례로 장엄한 봉헌식을 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로 한보그룹이 도산하고, 당진 산업공단에 입주하려던 기업들이 차질을 빚으면서 지역 분위기는 급랭해졌고, 본당 신설 구상도 접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7대 당진본당 주임 김신호 신부를 중심으로 공소 신자들이 7000만 원을 모금해 2003년 사제관을 짓고 보좌 신부들이 돌마루공소에 상주하며 본당 승격의 희망을 가꾸어 갔다. 그러나 이후 본당 여건상 사제의 공소 상주가 어려워졌고, 지금은 매월 한 차례 공소에서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돌마루공소가 자리한 정미면에는 1883년부터 공소가 설립됐다. 그중 가장 오래된 공소가 마중공소와 산성리 염솔공소다. 이후 1892년 덕삼리에 삼성벌공소, 1893년 수당리에 안국공소, 대운산리에 굴뫼공소가 생겨났다. 당시 정미면에 있는 공소들은 50명 이하의 신자들이 모여 신앙생활을 했다.
돌마루공소 예수성심상.
돌마루공소 성모상.
100여 년 신앙 전통 돌마루에서 새 출발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899년 12월 23일과 1906년 11월 13일 두 차례 마중공소를 방문했다. 마중공소는 6칸짜리 공소 건물 외에 1칸 반짜리 사제관이 있어 주교가 그곳에서 묵었다. 첫 번째 방문에서 뮈텔 주교는 마중공소 신자들과 함께 주님 성탄 대축일 밤미사를 봉헌했다. 두 번째 방문에서는 개축한 공소 건물을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했다. 이날 공소 봉헌식에는 신자들이 너무 많이 와 첫날 마루가 무너져 내려앉았고, 공소 안에 다 들어올 수 없어서 밖에 서서 미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공소 집이 아주 넓었지만 견진자가 너무 많아서 혼잡을 피하기 위해 움에다 제대를 설치했다. 움은 넓었다. 견진자 36명. 낮에는 바람이 아주 심하게 불었다. 오늘은 마침 옹기들을 굽는 날이어서 이번 가마의 옹기와 다음 가마들에 대해 하느님의 축복을 빌기 위해 나에게 가마의 축성을 부탁했다. 저녁때 크렘프 신부와 함께 가마에 불을 지피는 의식에 참여했다. 그러고 나서 내일 있을 15명 견진자들의 준비를 끝냈다.”(「뮈텔 일기」 1906년 11월 13일)
뮈텔 주교는 마중공소 신자들의 반은 논농사를 짓고, 나머지 반은 화전민이라고 했다. 1920년대 들어 마중공소는 서서히 쇠락해 갔다. 일제의 새 산림법에 의해 벌목을 하지 못하고, 새 연초법으로 담배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자 살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 마중공소는 신자 수 2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신자가 도시로 떠나갔고, 1987년에는 12세대 38명의 신자가 공소 명맥을 이었다. 이마저도 1996년 1월 돌마루공소에 편입되면서 100여 년의 유서 깊은 마중공소 역사를 마감했다.
돌마루공소 뒷산에 설치돼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
돌마루공소 마당에 조성된 담에 그려진 벽화.
승효상 건축가가 애정 쏟은 ‘빛의 기둥’
초기 염솔공소로 불렸던 산성공소 역시 마중공소의 역사와 비슷한 발자취를 남겼다. 산성공소는 예산 간양골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주해 산성리 염솔에 정착하면서 시작됐고, 1898년 독립 공소가 됐다고 한다. 1920년부터는 마중공소의 교세를 능가하는 공소로 성장했다. 당시 산성공소 신자들은 50명 안팎이었으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한 개 학교도 운영했다고 한다. 산성공소도 산업화를 거치면서 신자 수가 급감해 1996년 돌마루공소로 편입됐다.
산성공소 출신 한 교우의 증언이다. “당진군 정미면 산성리에서 순교자 후손으로 태어나 태중은 고난을 겪어 오면서도 오로지 하느님만을 향한 일생을 지내왔다. 조부모께서는 갓난아이를 남겨 두고 포졸에게 밧줄로 얽혀가 순교를 당하셨다. 조부모께서 치명을 당하시자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산속으로 피해 온양·공주 등으로 이리저리 피해 다녔단다. (?) 그때 당시 치명 당하는 것보다 밧줄에 묶여 이 동네 저 동네 끌려 다니며 갖은 모욕과 학대가 더욱 참기 어려웠다. 저녁에 잘 차려입고 외출하면 교인으로 수상히 여기기 때문에 새 옷은 보따리에 싸 넣고 가서 미사 드릴 때는 새 옷으로 갈아입곤 했다.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루도 아침기도 저녁기도를 궐한 적이 없고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저녁에 묵주기도 5단을 바친다. 시간이 되는대로 아침에 묵주 기도 몇 단을 바치고, 점심때에도 삼종기도와 묵주기도를 몇 단 바친다. 혹시 너무 바빠 기도드릴 시간이 없으면 불을 때면서, 일하면서, 걸어가면서 기도를 바쳤다.”(산성공소 강 막달레나 증언-「당진본당사-70주년 기념집」 83쪽)
돌마루공소는 승효상 건축가가 저서 「빈자의 미학」 표지 사진으로 소개할 만큼 애정을 쏟았던 건축물이다. 안타깝게도 세월과 함께 공소 건물은 편의와 필요에 의해 많이 변형됐다. 노출 콘크리트 외벽에 흰색 페인트가 칠해졌고, 공기 순환을 위해 뚫린 공간도 겨울철 실내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메꾸어졌다. 그 외 여러 곳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필요로 채워지고 비워졌다.
돌마루공소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제단 뒷벽에 세로로 가로지른 여백의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승효상은 이를 ‘빛의 기둥’이라고 했다. 수직으로 하강하고 상승하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찬미를 형상화한 듯하다. 마치 빛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성령의 강림을 시각화한 듯한 장엄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