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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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의 삶과 구원사 그린 ‘그림의 하늘’, 루체른 헤르기스발트 성당

[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62. 스위스 루체른 헤르기스발트 순례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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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른 헤르기스발트 순례 성당. 1489년 요하네스 바그너 수도자의 은수처에서 시작해 17세기 카푸친회에 의해 바로크 순례 성당으로 확장됐고, 2003~2005년 전면적으로 재단장했다. 현재 순례 사목은 바젤 교구 크리엔스 성 갈루스 본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 사목 공동체가 맡고 있다. 성당 앞에서 루체른 도시 전경과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17세기 중반의 루체른. 강을 가로지르는 카펠교와 도시를 둘러싼 성벽과 수문 체계는 루체른이 교통과 방어의 요충지였음을 보여 준다. 오른편에 종교개혁 이후 중부 스위스 가톨릭의 대표적 상징이 된 성 레오데가르 성당이 보인다.


산과 호수가 감싸고 있는 루체른은 스위스에서 풍경이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힙니다. 특히 지붕을 덮은 목조다리 카펠교는 오늘날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관광명소입니다. 그런데 이 다리는 본래 도시 생활의 흐름을 이어 주는 통로이자 방어 시설로, 물길을 따라 형성된 루체른 도시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루체른은 로이스강과 호수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호반 도시로, 알프스를 넘는 고트하르트 고개로 향하는 북쪽 관문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산을 넘은 상인과 순례자들은 우리(Uri)를 거쳐 루체른에 이르렀고, 여기서 다시 호수와 강을 따라 독일과 북해 상권으로 이동했습니다. 물길을 따라 들어온 사람과 물자가 카펠교를 건너 도시로 드나들며, 루체른은 그렇게 많은 이가 지나가는 길목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사실 도시의 이런 성격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루체른은 스위스 여행의 정점이라 여기는 융프라우요흐로 향하는 여정에서 들르는 곳이지요. 그러나 신자라면 루체른을 그렇게만 지나치기에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루체른 남서쪽 숲 속에 중세 순례자들이 경험했을 ‘머무름의 신앙’을 간직한 루체른 주의 대표적인 성모 순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헤르기스발트의 로레토 소성당. 1648년 프랑스 왕실의 후원으로 조성된 공간으로, 나자렛 성가정의 집(Santa Casa)을 축소 재현했다. 중앙에는 로레토 전통을 잇는 검은 성모상이 모셔져 있고, 맞은 편에는 순례자들의 봉헌판들이 걸려 있다. 1649년에 당시 동향(東向)이던 옛 성당의 북쪽에 먼저 증축됐고, 이후 1652년 현재의 북향(北向) 본당이 새로 세워지면서 측면 소성당으로 통합되었다.

황금동맹 시대에 형성된 성모 순례지

루체른 중앙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곧 산과 숲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20분 남짓한 이동이지만, 창밖으로 펼쳐지는 초원과 숲의 풍경 덕분에 시간은 더 길게 느껴집니다. 해발 2132m의 필라투스 산이 시야에 들어올 즈음, 완만한 오르막 숲길 끝에 헤르기스발트 순례 성당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의 역사는 중세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489년 이팅겐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의 요하네스 바그너 수사가 이곳에 정착해 은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루체른의 폰 빌 가문의 도움으로 숲을 개간했고, 1501년 콘스탄츠교구 주교의 허가를 받아 소성당이 세워져 1504년 봉헌됐습니다. 요하네스 형제는 1516년 성덕의 명성을 남기고 선종했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며 헤르기스발트는 본격적인 성모 순례지로 조성됩니다. 종교개혁으로 스위스 연방이 분열되는 가운데, 루체른은 가톨릭에 남아 중부 가톨릭 지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습니다. 1586년 루체른에서는 일곱 가톨릭 주가 서로 협력해 신앙을 지키자는 황금동맹(Goldener Bund)을 체결했는데, 이들 지역은 알프스 북사면을 따라 호수와 산길로 이어져 있어 알프스를 넘는 교통과 호수 수계를 공유하며 신교 세력의 위협에 맞섭니다.

1574년 예수회가 루체른에 들어와 가톨릭 교육의 기반을 다졌고, 1583년에는 카푸친회가 사목활동에 힘을 보태며 가톨릭 부흥을 이끕니다. 헤르기스발트 순례지도 이러한 종교·사회적 배경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카푸친회 루트비히 폰 빌(1596~1663) 신부는 로레토 소성당(1649)과 성 펠릭스 소성당(1651)을 포함해 지금의 바로크 양식의 성당을 완성하며 순례지 성격을 결정지은 핵심 인물입니다. 그가 신학적으로 기획한 성당 내부 회화와 장식은 중부 스위스 바로크 예술의 출발점으로 평가됩니다.
헤르기스발트 순례 성당 주제대와 본랑. 단일 신랑 형태로 비교적 단순하지만, 장식의 밀도는 높다. 주 제대는 1855년 제작된 ‘주님 탄생 예고’ 제단화를 중심으로 채색 목조상이 입체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324점의 목판 패널로 구성된 천장의 ‘그림의 하늘’로 성모 신심과 구원사의 상징을 서사적으로 구현했다.
천장 패널 ‘그림의 하늘’ 중 산 위의 성모(남쪽 48)와 벌집(남쪽61). 선택과 거룩함으로 성모 마리아를 “모든 산 위에 솟은 산(mons altissimus)”으로 묘사했다. 성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를 상징하며, 두 팔을 펼친 모습은 자비와 보호의 상징이다. 벌집의 “나는 모든 것을 꿀로 만든다(OMNIA IN MEL VERTO).” 모토는 벌이 꽃에서 꿀을 모으듯, 사람들 안의 선을 길러 삶을 달콤함으로 변화시키는 성모의 은총을 상징한다.

324개 성모 목판 패널로 이뤄진 그림의 하늘

여느 바로크 성당이 그렇듯, 헤르기스발트 역시 신앙을 눈으로 보고 묵상하도록 이끕니다. 특히 성당 천장은 독보적입니다. 한 장의 대형 벽화가 아니라, 324개의 목판 패널로 구성된 ‘그림의 하늘’이 성모 마리아의 삶과 구원사에 얽힌 신학적 메시지를 촘촘히 엮어냅니다. 하느님 은총이 성모님을 통해 충만히 주어진다는 “이것으로 충분하다(SUFFICIT)”, 원죄없이 잉태하신 성모님을 나타내는 “온전히 아름답다(TOTA PULCHRA ES)” 등 각 패널에 적힌 라틴어 표어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천장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그림 묵상서가 됩니다.

주 제대는 ‘주님 탄생 예고’를 그린 대형 제단화를 중심으로 채색 목조 조각들이 입체적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대천사 미카엘과 라파엘이 한 장면을 이루듯 서 있습니다. 순례자는 이른바 ‘천사의 창’을 통해 성가정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북쪽 측랑에는 로레토 소성당이 있습니다. 로레토 소성당은 튀르크 세력이 성지에 침입하자 천사들이 나자렛에 있던 성가정의 집을 이탈리아 안코나 월계수 숲으로 옮겼다는 전승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로레토 순례가 어려웠던 이들을 위해 유럽 각지에 성가정의 집이 축소 재현되었는데, 헤르기스발트의 로레토 소성당도 그중 하나로 1648년 프랑스 왕실의 후원으로 세워졌습니다.

소성당 안은 성가정의 생활 공간처럼 꾸며져 있습니다. 철제 격자 뒤에는 화덕 모형이 놓인 ‘부엌’이 표현되어 있고, 공간의 중심에는 검은 성모상이 자리합니다. 뒤쪽 벽을 채운 봉헌 그림들은 기도 응답과 치유의 기억을 전하며, 이곳이 오랜 세월 순례자들의 청과 감사가 쌓인 장소임을 알 수 있지요.

헤르기스발트 순례 성당은 장엄한 분위기에 경건해지기보다, 천천히 머물며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지닌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세상의 빠른 흐름 속에서도 멈춰 설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되지요.

우리가 돌아갈 도시는 여전히 분주할 겁니다. 저 아래 루체른에서 다시 어디론가 향하는 여정이 시작되겠지요. 그렇지만 그 여정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께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을 숲에서 내려가며 생각해봅니다.
 
<순례 팁>

※ 루체른 중앙역에서 버스 71번을 타고 20여 분.(Hergiswald Kirche 정류장 하차) 숲길 하이킹 코스(1시간) : 헤르기스발트→오버나우→크리엔스(크리엔스와 루체른 사이 트램 이동). 순례자를 위한 레스토랑/호텔(Hotel Gasthaus Hergiswald)

※ 미사 전례 : 주일 및 대축일 10:00 미사, 평일 15:00(수·금). 서쪽 끝 초대 교회 순교자인 성 펠릭스의 성유물을 모신 성 펠릭스 소성당.

※ 혼자 가시기 힘든 분을 위해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마련한 2026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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