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문학을 통한 사도적 삶,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 - (4) 다만 해바라기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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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손주와 함께 집에서. 1989년 아들 원태가 살아있을 때 사놓고 사용하기를 권했던 워드프로세서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해 역사소설 「미망」을 집필했다. 박완서 작가는 컴퓨터로 글을 쓰는 작가가 많지 않았던 때부터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컴퓨터로 쓰고 저장하는 작업을 했다. 1950년대에 이미 원두커피를 즐겼고 오븐이 없던 시절에도 집에서 빵을 굽고 별식으로 멘보샤를 만들 정도로 감각적인 ‘얼리어답터’였다고 맏딸 호원숙(비아)은 어머니를 기억한다. 박완서디지털문학관 제공
거룩함보다 눈부신 ‘보통의 진심’
스스로 빛나고 싶다는
세속적 욕심까지 드러내는
가감 없는 신앙 고백
가장 좋아한 예수님 말씀
“너희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낮은 곳 향한 시선과 자기 성찰
“노점상에선 깐깐한 나를…
부끄러움이 뭔지 깨닫게 하소서”
현실 속 자신의 모습 엄격히 돌아봐
주님, 하필 왜 소금이 돼라 하십니까? 저는 싫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그러나 박완서는 단호히 소금이 되지 않겠다 말한다. 소금은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있어야 하는 존재이며 소금 자체만으로는 겉모습도 볼품없고 짜기만 한 맛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소금은 음식 속에 묻혀있을 때 오히려 빛을 발하고 스며들어야 비로소 음식을 썩지 않게 하며, 맛의 균형을 찾아준다.
박완서는 스스로 태어난 것에 보람을 느끼고 싶고 남의 눈에 띄는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다른 이에게 사랑받고 존경받고 싶은 존재이며 소금이 아니라 아름다운 꽃이나 별, 나무, 파도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말한다. 또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빛이 되고 싶지만 빛이 되려면 촛불이나 횃불처럼 내 몸을 태워야 하니 그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남 좋은 일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신 언행이 주님의 빛을 기리며 부지런히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가 되고자 한다. 금력이나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가 안 되는 것만도 인간으로서 쉽지 않은 일임을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이렇듯 박완서의 신앙 고백은 그 역시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고 때로는 지극히 세속적인 욕심으로 가득 차 있지만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모두 가감 없이 솔직하게 고백한다는 점에서 신앙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박완서 작가가 피천득 선생과 김후란 시인과 함께 문학의 집 서울에서 함께한 사진. 가톨릭평화신문 DB
고해성사가 숙제였던 두 거장
같은 가톨릭 신자이자 문학계 선후배 사이로 친분을 쌓아온 수필가 피천득 선생과 고해성사에 대해 나누는 대화에서는 슬며시 웃음이 지어진다. 시대의 거목이라 일컬어지는 두 사람에게도 고해성사는 늘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가톨릭이 좋은데 고해성사는 참 싫어요. 아무리 하기 싫어도 1년에 두 차례 부활절과 성탄절에는 해야 하잖아요. 그게 왜 의무가 돼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억지로 만들어서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말해야 하나요? 선생님께서는 성당에서 나눠준 성사표를 그냥 통 속에 집어넣어 버린다면서요? 한 번은 그러시다가 신부님께 들키기까지 하셨다면서요?”
이에 피천득 선생은 한 발 더 나아간다.
“뭐, 들켰다기보다?. 난 말할 게 없으니까. 물론 따져보면 나도 죄가 있겠죠.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다 아실 텐데 한 다리 걸쳐서 그럴 필요가 있어요? 하느님이 다 아실 것 아녜요?”(박완서의 말 : 소박한 개인주의자의 인터뷰) 중 일부
한밤중 서재를 채운 풍란 향기처럼? 일상에 스며든 주님의 은총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박완서는 여전히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1970년 등단 이후 40여 년간 660여 편의 에세이를 비롯해 80여 편의 단편과 15편의 장편소설을 포함하여 동화·산문집·콩트집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집을 남겼다. 또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 코너에 3년여 간 묵상록을 연재했다. 이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때때로 만나는 주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려 독자들에게 들려줬다.
박완서는 친한 친구로부터 제주도 풍란 화분을 선물 받은 일화를 들려주며 주님과의 만남을 상기시킨다. 살아있는 생물을 선물로 받는다는 건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특히 난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죽인 일이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선물을 받으면서도 몹시 걱정되었다. 친구는 풍란의 향이 아주 진하고 좋다고 했는데 실제로 아무리 맡아도 잘 느껴지지 않아 내 코는 냄새를 잘 못 맡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서재 문을 열었는데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그윽한 향기를 맡고 깜짝 놀랐다. 한밤중의 은밀한 만남에 황홀한 기쁨을 느끼며 주님과의 만남도 그러한 것이라는 걸 문득 깨닫는다. 예수님을 만난 것은 자유의사였을까 주님의 부르심이었을까. 나는 과연 주님을 영접한 것일까 골몰했지만 결국 주님과의 만남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늦은 가을 어느 날 집 앞 울창한 숲을 가만히 바라보며 느낀 소회에도 깨달음이 담겨있다. 밤나무가 많은 그 숲에는 하루 종일 여러 사람이 오가는데 흥미로운 것은 아침 일찍 남보다 먼저 숲으로 들어간 사람이나 오후가 다 되어 느지막이 들어간 사람이나 거의 같은 양의 밤 주머니를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숲 속에 있기는 있되 보이지 않는 분배의 손길이야말로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비와 다름없다.
1990년 프랑스 루르드 성지 순례 중 루르드 로사리오 대성당에서 박완서 작가(오른쪽)가 친구이자 대모와 함께. 박완서디지털문학관 제공
박완서는 실상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남에게는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치부라 여겨지는 속마음조차도 솔직하게 고백해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앞서 피천득 선생과의 일화에도 등장했던 고해성사에 대해 박완서는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성탄절을 앞두고 판공성사를 볼 때마다 마치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야단을 맞는 것처럼 곤혹스러워진다는 것이다. 고백할 잘못이 생각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남들이 저지르는 잘못에 비하면 새발의 피 같아서 이 정도면 제법 준수한데 뭣 하러 성사까지 보아야 하나 하는 반발심까지 든다고 말이다. 이렇게 잘못을 축소하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엉터리 성사를 보고 난 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잘못들이 줄줄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며 고작 몇 푼의 후원금을 내고는 마치 할 일을 다한 듯 여겼던 삶을 떠올리며 반성한다. 이러고도 주님을 맞을 자격이 있는지 자책하면서 말이다.
“주님이 제게 임하시진 않더라도, 왜 주님이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평범하고 겸손하고 순결하게 사는 여인의 배를 빌려 이 세상에 오셨는지, 그 엄숙한 진리로 저를 두들겨 깨우소서.”(묵상집 「빈 방」 중)
예수님 말씀 중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40)라는 구절을 가장 좋아했다. 이 구절을 발견하고 매혹되기 시작한 것이 결국 훗날 세례를 받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이 말조차 따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집에 오는 손님도 잘 차려입은 사람이면 좋은 것을 대접하려고 했고 내가 사는 모습이 초라해 보이지 않을까 못내 마음이 쓰였다.
반대로 가난하고 근심 있어 보이는 친지가 찾아오면 혹시나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또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때는 한 푼 깎을 엄두도 못 내면서 전철역 앞 노점에서 푸성귀를 사며 흥정할 때는 이리 재고 저리 재며 깐깐하게 구는 ‘고약한 버릇’도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러면서 주님께 이 어리석고 딱딱한 마음에 작은 균열을 내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것이 곧 기적이 되기를 바라며.
“주님, 제가 만일 주님께 심판 날 ‘제가 앉을 자리는 왼편입니까, 오른편입니까?’하고 묻는다면 저는 죄인 중에도 가장 얼굴 가죽 두꺼운 죄인이 되겠지요.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부끄러움이 뭔지 깨닫게 하소서.”(묵상집 「빈 방」 중)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