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소설 「천주의 아이들」과 그림책 「옹기에 그린 십자가」를 쓰고 난 뒤에 나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할 기회가 주어졌다. 일반인들에게, 곡성성당에서, 도서관에서 어린이들에게 조선박해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영광은 광주대교구 목포 옥암동성당에서 사순 특강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옥암동성당 주임으로 사목하신 박홍기(하비에르) 신부님은 나와 특별한 관계다. 신부님은 곡성본당 출신으로, 내 아들의 대부이면서 친구의 동생이자, 여동생의 친구까지 된다. 이 정도의 인연으로 끝나지 않는다. 신부님의 도깨비 마을 방문은 3~4년에 한 번 정도 된다. 그런데 내가 「천주의 아이들」을 쓰려고 노트북에 제목을 쓴 날, 세상에! 신부님이 나의 방 문을 두들기셨다. 이보다 반가운 일이 어디 있을까! 신부님은 내 노트북에 축복을 내려주셨고, 나도 신부님 뒤에서 내 글에 두 손을 모았다. 신부님도 노트북에 축복을 내린 건 처음이겠지만, 내가 내 글에 두 손을 모아 기도한 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신부님이 축복을 내린 책임으로 사순 특강을 주신 것일까? 난 열심히 준비했다. 각시 가브리엘라는 틈틈이 잔소리했다. “피피티는 준비해야지”,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사순절이 얼마나 소중한 날인지 알지?” “요들을 불러서도 안 되고.” 나도 얼마나 큰일인지 알지만, 아무 일도 아닌 척했다. 내가 그때만큼 노래 연습을 많이 한 경우는 없었다. 난 강의하면서 노래도 한다. 책을 노래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래로 한다. 당연히 사순절 특강에도 노래를 준비했다. 그런데 여동생이 ‘아무것도 너를’은 꼭 불러야 한다고 했다. 가장 위로받는 성가라고 했다. 나도 수백 번 부르면서 위로를 받았다.
옥암동성당은 전라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곡성성당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컸다. 혼배미사 때 곡성성당 제대 앞에서 주인공이 되었던 뒤로 30여 년 만에 다시 하느님 제대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특강은 신자들과 함께 노래하면서 시작했다. 난 소설을 쓰는 내내 나에게 되물었던 ‘난 순교할 수 있었을까?’를 교인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집에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 살려드릴게요. 순교하실 분 있어요?” 많은 신자 중에서 한 분이 커다란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해주었다. 한사람, 그것으로 됐다.
그리고 내가 글을 쓰는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아픔을 느껴보기 위해서 손톱으로 발등을 꾹 눌러보곤 했다. 내가 예수님의 아픔을 느껴보는 방법이다. 신자들에게도 가르쳐줬다. 난 요즘도 발을 씻으면서 한 번씩 눌러 본다. 손톱만으로도 이렇게 아픈데?.(사순 특강 모습은 유튜브 ‘촌장님 오늘은 머해요?’에서 만나 볼 수 있다.)
난 소설을 쓰면서 200년 전 박해받았던 분들과 함께했다. 묵상도 많이 했다. 그때 한강 작가가 화두 같은 질문을 던졌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난 믿는다. 박해를 받으며 숨어 살았던 옹기 교우촌 사람들이 현재 우리의 삶을 도울 것이라고,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순교자들이 우리의 영혼을 구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