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문학을 통한 사도적 삶,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 - (5·끝)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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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김홍신 작가가 1993년 12월 27일 본지가 주최한 제1회 신춘평화문학상 응모작을 심사하며 대화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작품 속 음식 통해 삶의 고단함 위로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목소리 내고
유니세프·성 라자로 마을 등 후원
“부의금 받지 말라”던 평소 유언 따라
문학인장 대신 소박하게 가족장례식
‘한국인은 밥심이다.’
이 말을 문학 작품 안에서 가장 잘 그려낸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 박완서다. 그의 작품에는 서민 가정의 밥상에 오르는 나물 반찬, 된장국 같은 소박한 음식부터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는 양반가의 음식까지 작가 특유의 감각적인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
제육을 몇 점 썰어 넣어 뚝배기에 끓인 호박김치찌개(대하소설 「미망」), 배불뚝이가 뒷짐을 진 것 같은 모습이 유머러스한 개성식 만두(등단 단편 「나목」), 비 오는 날 먹었던 메밀칼싹두기와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해주셨던 수수팥떡(자전 수필 「호미」) 등 음식들은 각 작품 속에서 주인공과 시대적 배경을 긴밀히 묘사하는 장치로 쓰였을 뿐 아니라, 밥상을 대하는 것 자체가 삶의 고단함을 녹여주는 위로의 행위로 표현된다. 「대범한 밥상」이라든가 「후남아, 밥 먹어라」처럼 제목에 밥이 등장하는 소설 작품도 있다. 박완서에게 밥은 어릴 적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는 그리움의 이름이자 푸근한 어머니의 품이다. 처마를 맞댄 이웃 간에 나누는 정(情)이며 따뜻한 위로다.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고통에 몸부림칠 때 내 안에 오신 주님을 느낀 것이 바로 ‘밥’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하며 「엄마의 부엌 :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을 펴낸 맏딸 호원숙(비아)은 ‘엄마의 치맛자락에 늘 희미하게 배어 있던 음식 냄새는 여지껏 나를 지탱해 주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온한 사랑의 힘이 되었다’고 썼다.
생전 어느 강연회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청중의 질문에 박완서는 ‘밥’이라 대답했다. 또 그는 성경 가운데 음식에 관한 예수님의 일화를 좋아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행한 마지막 의식도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는 것이었는데, 이 최후의 만찬이 가장 슬프고 숙연한 식사라면 가장 장엄한 대만찬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인 기적의 만찬이라는 것이다. 기적에 앞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인간이 느끼는 고통 중에 가장 큰 배고픈 서러움을 마음속 깊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인간이 타인에 대해 가져야 하는 마땅한 태도로 가르쳐 온 유교의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그는 또 만약 예수님을 실제로 만난다면 으리으리한 성찬이 아닌 소박한 집밥 한 상을 차려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분은 화려한 식탁이 아니라 정성이 담긴 음식이면 좋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993년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의 일환으로 방문한 에티오피아에서 아이들과 함께한 박완서 작가(뒷줄 서 있는 이). 박완서디지털문학관 제공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생전의 박완서는 문인들 사이에서도 소박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 문단의 거목이면서도 문단 행사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학연을 따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따르는 후배 문인이 많았다. 소질이 있어 보이는 후배라면 적극적으로 추천하였으며 스스럼없이 후배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세상 일에 목소리를 내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198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섰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한국작가회의)가 어려울 때마다 수백만 원씩 사비를 털어 재정을 도왔다. 출판사 ‘창비’가 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을 때에는 지식인 2853명이 서명한 문서를 소설가 황순원·이호철 등과 함께 당시 문화공보부에 내기도 했다.
생전에 “내가 죽으면 찾아올 후배 문인 중에 가난한 이들이 많으니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당부해 2011년 1월 그의 빈소가 차려진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는 ‘부의금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안내문이 세워졌다. 애초 문학인장으로 치러지려던 장례식은 주위에 폐를 끼치지 말고 소박하게 치러달라는 고인의 바람대로 생전에 신앙생활을 하던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성당에서 가족장으로 거행되었다.
“천주교는 유명한 사람도 보통의 신자들과 똑같이 대하고 종교를 강요하지 않아 좋았다”는 그의 말처럼 평생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을 감싸안았던 그의 모습 그대로 조용하면서도 남을 돕는 따뜻한 신앙인이었다.
1993년부터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활동했고, 한센인 자활 시설인 ‘성 라자로 마을’을 20년 넘게 후원하였으며 2006년 호암상 예술상 수상으로 받은 상금 중 일부를 이곳에 기부하기도 하였다. 또 ‘성 라자로 마을’로 인연을 맺은 고(故) 이경재 신부를 도와 은퇴 사제들을 위한 거주 시설인 ‘사제마을’의 초대 후원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며 신자들을 위해 봉사한 은퇴 사제들이 말년에는 편안한 시설에서 돈 걱정 없이 여유롭게 지내며 마지막까지 사목 봉사를 하는 데 전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2005년 4월 8일 바티칸에서 거행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장례미사에 참석한 후 로마에서. 박완서 작가(가운데) 왼쪽이 한승수 전 국무총리, 오른쪽이 고 이해찬 전 국무총리다. 오른쪽 두 번째에 봉두완 전 앵커도 보인다. 박완서디지털문학관 제공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지난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장례미사에 대한민국 민관합동조문단의 일원으로 로마 바티칸에 다녀온 박완서는 소회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교황을 애도하는 몇백만 조문객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비통하기만 한 것도 경건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성가는 영혼을 속세에서 해방시켜 들어 올리듯 황홀했고, 교황의 업적을 낭독하는 동안 광장에서 터져 나온 십여 차례의 박수와 환호성, (?) 그건 애도라기보다는 환호에 가까웠다. 슬픔과 환희가 이렇게도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 본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매일 아침 저녁 명상하듯 기도 시간을 갖는다던 박완서는 2011년 1월 22일 평소처럼 명상을 하듯이 편안한 모습으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장례미사에는 여러 문인 후배와 성직자, 수도자, 동료 신자와 유족들이 함께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 가운데 생전에 깊은 교분을 나눈 이해인 수녀도 있었다. ‘수녀 시인’으로 유명한 이해인(클라우디아) 수녀는 박완서와 자매처럼 지내며 정을 나누었고 1988년 그가 가족을 연이어 잃는 고통을 겪을 때 수녀원으로 초대해 슬픔을 위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종 직후부터 장례일까지 내내 빈소를 지켰으며 ‘꽃이 된 기도’라는 송별시로 추모했다.
‘갑자기 오느라 작별인사 못했어요 / 너무 슬퍼하면 제가 미안하죠 / 거기도 좋지만 여기도 좋아요 / 항상 기도 안에 만납시다, 우리’(이해인 수녀의 ‘꽃이 된 기도’ 중)
2011년 1월 22일 선종한 박완서 작가. 한국가톨릭문인회 담당 조광호 신부가 장례미사에서 고인의 관에 성수를 뿌리며 고별예식을 주례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생전에 ‘내가 죽었을 때 받고 싶은 대접은 천주교식의 장례미사’라고 했던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은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절망보다, 큰 평화 안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40살이라는, 당시로써는 다소 늦은 나이에 등단했지만 ‘머릿속에 늘 다음 작품을 생각하고 있다’며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없다면 주머니에 동전 한 푼 없는 것보다 더 비참할 것’이라던 박완서. 죽는 날까지 작가로서 ‘영원한 현역’으로 남고 싶어 했던 그는 이제 주님의 품에서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