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교회 크라쿠프대교구 카리타스가 운영하는 무료 급식소 ‘성 알베르토의 부엌'이 성탄 대축일에 제공하는 성탄 만찬. 크라쿠프 카리타스 제공.
폴란드 크라쿠프대교구 카리타스가 운영하는 무료 급식소 ‘성 알베르토의 부엌’에서 한 이용자가 수프를 먹고 있다.
2025년 12월 12일 아침, 폴란드 크라쿠프대교구 카리타스가 운영하는 무료 급식소 ‘성 알베르토의 부엌’ 앞에 행려인 등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폴란드 크라쿠프대교구 카리타스가 운영하는 무료 급식소 ‘성 알베르토의 부엌’ 앞에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얼굴들이 줄을 선다. 이들은 한 손에는 따뜻한 수프를, 다른 한 손에는 내일을 버틸 힘을 쥐고 문을 나선다.
한편, 바르샤바대교구 성 야고보 수도원 성당 복도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한창이다. 아기자기한 장식과 케이크가 늘어선 이 공간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돕기 위한 기금 모금의 현장이다.
2016 크라쿠프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의 주제였던 ‘자비’는 오늘날 폴란드 교회 안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향한 여정에서 역대 WYD 개최지를 찾아 그 열매를 조명하는 cpb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과 2027 서울 WYD 조직위원회 공동기획 ‘개최지를 가다’. 폴란드 교회 마지막 편에서는 일상 현장에서 하느님 자비를 실천하는 ‘오늘의 폴란드 교회’를 비춘다.
수프 한 그릇에서 시작된 자비
2025년 12월 12일 아침, 크라쿠프 중앙역에서 차로 15분가량 떨어진 시내 대로변에는 이른 시간부터 음식 냄새가 풍겼다. 출근길 시민들 사이로 식당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은 얼핏 ‘맛집’을 연상시키지만, 이곳은 교구 카리타스가 운영하는 무료 급식소다. 행려인과 홀몸 어르신, 몸이 불편한 이들 20여 명이 저마다 크고 작은 통을 들고 교회가 마련한 따뜻한 한 끼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식당 안의 수녀와 카리타스 직원, 봉사자 7명의 손길은 더욱 분주해졌다. 매일 약 500인분의 식사가 준비된다. 주방을 이끄는 레오카디아 마르티니악(알베르토 수녀회) 수녀는 “두 개의 큰 솥에 주로 고기가 들어간 수프를 끓인다”라며 “이곳을 찾는 이들이 하루에 꼭 한 번은 영양 만점인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은 금요일이라 금육을 지키기 위해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야채수프와 빵이 차려졌다.
‘성 알베르토의 부엌’을 이용하는 마르친 안제이차크(50)씨가 봉사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배식 줄에는 유난히 큰 통을 챙겨온 이들도 보였다. 거동이 어려운 가족의 몫까지 포장해가기 위한 이들의 모습이다. 6년째 봉사 중인 모니카 프라실(50)씨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건넬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며 웃음 지었다. 음식재료를 나르던 카리타스 직원 크시슈토프 술라르츠(62)씨 역시 “사람들이 기쁘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제가 받는 월급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전했다.
식당을 이용하러 온 마르친 안제이차크(50)씨는 “수녀님과 봉사자들이 너무나 친절하고 음식도 맛있다”며 “성 알베르토의 부엌 덕분에 오늘도 굶주리지 않아 행복하고 고맙다”고 기뻐했다. 진정한 ‘자비의 맛집’으로 거듭나는 사랑의 현장이다.
마르티니악 수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6 크라쿠프 WYD에서 ‘가난한 이들이야말로 신앙의 증인’이라고 강조하셨다”면서 “이곳에서의 봉사는 하느님 자비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며, 우리는 계속 그 답을 드리고자 이웃과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이는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느낀다”면서 “자비의 실천이 곧 사랑”이라고 덧붙였다.
2025년 12월 14일 폴란드 교회 바르샤바대교구 성 야고보의 수도원 성당 복도에 우크라이나인들을 돕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렸다.
배를 채우고, 마음을 잇다
“맛있는 케이크 드셔 보세요!” “재미있는 책들이 한가득 있어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만든 도자기 어떠세요?”
2025년 12월 14일 오전 11시 30분. 바르샤바대교구 성 야고보 수도원 성당에서 주일 미사가 끝나자, 신자들이 우르르 성당 복도로 나왔다. 집으로 향하려던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날 마련된 크리스마스 마켓. 도미니코회 제3회원들이 전쟁을 피해 삶의 터전을 떠난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돕기 위해 마련한 자선 행사다. 제3회는 삶의 자리에서 수도회 정신을 실천하는 평신도 공동체로, 이날 행사에는 약 40명의 봉사자가 함께했다.
마켓에 진열된 크리스마스 트리 오너먼트부터 케이크와 각종 액세서리까지. 이날만큼은 성당이 정이 넘치는 전통시장으로 변해 있었다. 진열된 제품들은 모두 마켓을 위해 기부받거나 직접 만든 것들이다. 판매 수익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 전해진다. 카타리나 코스톤(40)씨는 “스위스산 핫초콜릿과 폴란드 전통 빵, 폴란드에서 나는 모과로 만든 청 등을 팔고 있다”면서 “폴란드 도미니코관구는 지리적으로 폴란드 국경을 넘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에 걸쳐 있어, 전쟁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과 현지 수도자들을 적극 돕고 있다”고 했다. ‘봉사에 왜 참여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폴란드 교회에서는 서로 돕는 것이 특별하지 않고 늘 있어왔던 일”이라며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 말씀을 따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기에 뿌듯하고 재미있다”고 전했다.
한 부스에서는 헌 책들을 팔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책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것. 책을 구매하고 싶은 신자는 원하는 금액을 주고, 책을 가져갔다. 원하는 만큼 기부할 수 있는 방식이다. 가진 돈이 얼마 되지 않더라도 누구나 나눔에 참여토록 한 것이다. 그렇기에 자유로운 나눔의 현장은 그야말로 문전성시였다.
어린 자녀들과 함께 책을 팔던 봉사자 안나 하리라티오니(32)씨는 “자원봉사가 사회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을 믿는다”며 “이 과정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정말 좋아한다.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이웃을 위해 나누는 신앙심을 일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폴란드 교회 신자들에게 자비란 주일 미사 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일상과 같다.
그런데 현장에서 마켓을 진두지휘하는 이는 다름 아닌 청년이었다. 마켓 코디네이터 안나 스타드니카(41)씨는 지역 대학생들의 모임인 수도회 학술 사목 공동체 ‘프레타 10’ 소속이다. 스타드니카씨는 “오늘 모금된 기금은 우크라이나인, 특히 전사하거나 실종된 군인들의 남은 자녀를 돕는 데 사용된다”며 “우크라이나에는 최근 2주 사이 수십 발의 미사일이 떨어져 지금도 많은 사람이 전기조차 없이 생활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폴란드는 비교적 풍요로운 편”이라며 “우리의 풍요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것이 우리 마음”이라고 했다.
마켓은 2014년부터 매달 쉬지 않고 열리고 있다. 특히 주님 부활 대축일과 성탄 대축일을 맞아 열리는 마켓은 규모가 가장 크다. 폴란드 교우들은 매달 ‘자비의 축제’로 기쁨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주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숨 쉬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크라쿠프 WYD가 남겨준 자비의 가치를 숨 쉬듯 실천하고 이웃과 함께하는 모습이다.
‘프레타 10’ 담당 미할 라스코프스키(도미니코회) 신부는 “장터와 같은 공간은 단순한 모금 행사를 넘어 신자들이 따뜻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며 “교회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사람 간의 만남으로 구성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크라쿠프 WYD에서 젊은이들에게 실질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소파에서 일어나라’는 메시지를 전하신 후 폴란드 전역에서는 이처럼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매우 구체적인 활동들이 생겨났다”며 “자비에 대한 교황님 말씀이 하나의 빛처럼 실제 열매를 맺고 있는 순간들을 자주 확인한다”고 증언했다.
자비의 다음 무대, 서울
지정학적 이유로 수차례 침략을 겪고, 오랜 고통의 시간을 견뎌온 폴란드 교회의 변화는 ‘자비’가 상처 입은 사회를 어떻게 다시 회복시키고 일으킬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사는 한반도 역사가 자연스레 겹쳐진다. 전쟁과 분단, 식민지 지배와 독재를 거치며 한국 사회와 교회 또한 깊은 상흔을 안고 성장했다.
한국 교회의 젊은이들 역시 시대의 위기 앞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응답해왔다.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가 하면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삶과 재산을 내놓았다. 폴란드 교회가 자비를 통해 신앙을 실천으로 전환해왔듯 2027 서울 WYD는 한국 교회가 이 땅의 기억을 어떤 미래의 언어와 행동으로 이어갈 것인지 묻는 자리가 될 것이다. WYD는 단순히 젊은이들의 신앙 열정 축제가 아니라, 바로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인간다움을 성찰하는 ‘자비의 장’이다. 동시에 개최지 사회와 교회가 지닌 아픔과 고통의 역사를 나누고, 오늘날 당면한 과제를 교황과 함께 풀어가고자 미래로 빛을 비추는 ‘희망의 장’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라고 말씀하셨다.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삶을 전 세계 젊은이들이 체화하는 자리가 곧 WYD 현장인 것이다.
기억해야 할 상처와 쉽게 덮을 수 없는 일련의 역사 앞에서 자비를 실천하기란 어려워 보이지만 그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자비를 역사 위에 새겨온 보편 교회의 경험이 우리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탄압을 겪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신앙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던 폴란드 신자들이 실천 교회로 거듭나기까지. 그 과정을 써내려간 신앙적 모범서는 이미 보편 교회 안에 있다. 지난 WYD의 유산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폴란드 교회를 찾은 이유다.
자비는 정의와 닮아 보이지만, 같은 자리에 서 있지는 않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닌, 기억하되 복수로 되돌리지 않는 태도, 나아가 용서하고, 사랑을 전하는 주님 닮은 마음이다. 폴란드 교회는 ‘잊지 않되 자비로워야 한다’는 높다란 자비의 언덕을 넘어 망각이 아니라 더 깊은 성찰로 그것을 실현해내고 있다.
가톨릭 신앙에서 자비의 근원은 분명하다. 인간의 연약함과 폭력을 알면서도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셨다. 함께 살아가도록 창조된 인간이 끝내 서로에게 상처 입히는 존재임을 알면서도 그 사랑은 거둬지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 자비 역시 그 기억에서 출발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자녀를 향한 깊은 사랑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사랑처럼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크라쿠프 WYD가 개최되는 2016년을 ‘자비의 희년’으로 선포했다. 교황은 “자비는 교회 삶의 근본”이라며 “교회는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끝없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자비는 교회의 여러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닌, 교회를 가장 교회답게 해주는 은총의 정체성인 것이다. 자비를 증언하는 것이 곧 교회다.
이는 크라쿠프 WYD가 열리기 두 해 전인 2014년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한했을 때 남긴 메시지와도 상통한다. 교황은 방한 나흘째였던 2014년 8월 17일 세월호 유가족들을 따로 만났다. 바티칸으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도 교황은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가슴에서 떼지 않았다. ‘정치 중립’을 지적하는 이들에게 교황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는 중립일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라고 했다.
그렇기에 WYD 개최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부터 역대 교황이 보편 교회 곳곳에 꽂은 ‘자비의 깃발’과 같다. 크라쿠프 WYD 이후 2019 파나마 WYD는 주제 성구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를 통해 주님이 말씀하신 ‘자비’가 그대로 젊은이에게 이루어지길 소망했다. 이어 2023 리스본 WYD는 “마리아는 일어나 서둘러 길을 떠났다”(루카 1,39 참조)란 주제 성구로 이웃을 향하여 하느님을 알리고 자비를 실천할 것을 거듭 강조했다.
이제 한국 교회 차례다. 서울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발표한 WYD 차기 개최지다. 서울 WYD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자 비가톨릭 국가에서 개최되는 첫 WYD이다. 나아가 OECD 자살률 1위, 최저 수준의 행복도라는 우리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하느님 자비를 실현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역대 교황들이 평생 강조해온 ‘자비의 교회’라는 비전이 이제 서울에서 어떻게 구현될지 세계 교회가 주목하고 있다.
2027 서울 WYD는 국제행사를 넘어 한국 교회가 축적해온 고통의 기억을 연민과 사랑, 행동의 언어로 번역해 세계 교회와 다시 나누는 자리가 될 수 있다. 자비는 먼저 상처를 직시하고, 그 앞에 서는 용기로부터 시작된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전 전 세계 젊은이에게 남긴 유언과도 같은 서울 WYD 주제 성구다. 이제 그 용기는 서울에서 분명한 얼굴을 갖게 된다. 자비로 역사를 견뎌온 폴란드 교회의 시간은 서울 WYD를 향한 여정에서 ‘자비’가 왜 필요한지 증언하고 있다.
박예슬 기자 okkcc8@cpbc.co.kr
cpb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과 2027 서울 WYD 조직위원회 공동기획 ‘개최지를 가다’는 cpbc TV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됐다. 1부 프랑스 교회와 폴란드 교회가 담긴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들’(2월 18일 오전 9시 50분), 2부 호주 교회를 통해 보는 ‘교회의 오늘을 만드는 사람들’(2월 25일 오전 9시 50분), 3부 포르투갈 교회의 ‘신앙을 삶으로 선택한 사람들’(3월 4일 오전 9시 50분)이 3주에 걸쳐 안방극장을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