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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진단] 다리가 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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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부고가 있다. 너무 이르고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난 이들의 소식이다. 지난 1월 한국농인LGBT+ 활동가이자 수어통역사였던 김보석 활동가가 여행 중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보석과는 2023년 가을에 처음 만났다.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워싱턴 D.C.와 휴스턴·샌디에이고를 방문하며 미국의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배우고 현지 활동가들과 교류하는 스터디 투어에서였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여정 내내 낯을 가리고 어색해하던 나에게 보석은 “다빈님, 저도 예수 게이예요”라며 먼저 말을 건넸다. 퀴어이자 그리스도인이라는 보석의 소개는 천주교 활동가로서 내가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상기하게 해 주었다.

기존 한국수어에 깊이 뿌리내린 혐오 표현을 소수자를 향한 이해와 존중을 담은 다른 수어 표현으로 바꿔 나가던 보석은 이미 여러 운동의 장에서 농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에 맞섰다. 동시에 농사회 안에 존재하는 성소수자 낙인·혐오와 싸우며 여러 경계 사이에 다리를 놓아 온 사람이었다. 함께 미국에 다녀온 이후로도 수많은 집회와 현장에서 수어 통역을 맡고 있는 보석과 만날 수 있었고, 그때마다 괜히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곤 했다.

통역사로서 전문적인 모습 너머, 무대 아래의 보석은 밝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긴 여정 동안 동행한 이들을 편안하게 만들었고, 자주 웃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문제 앞에서 쉽게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특히 농인 접근권 문제에 관해서는 내내 강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 모습에서 많이 배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그가 어렵기도 했다. 코다(CODA, 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비장애인 자녀)로서 농문화와 청인 사회를 오가며 그가 체감해온 차별의 감각을 충분히 나눌 언어와 결을 나는 미처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내게는, 그리고 아마 많은 동료들에게는 이맘때면 유독 떠오르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2023년 2월 3일 세상을 떠난 초록나무 임보라 목사다. 초록나무 역시 교회와 성소수자 커뮤니티 사이, 신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언제나 다리를 놓는 사람이었다.

초록나무가 세상을 떠난 겨울, 나는 천주교 기관에서 일하며 성소수자 인권 활동에 참여하는 일을 점점 버겁게 느끼고 있었다. 교회 안에서는 자꾸 불편한 존재가 되는 것 같았고, 성소수자 동료들 앞에서는 애써도 늘 부족한 사람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참여하던 네트워크 활동에서도 한 걸음 물러나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초록나무의 부고를 들었다. 그 가슴 아픈 이별의 시간은, 내게는 다시는 도망치듯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심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석도, 초록나무도 서로 다른 세계와 언어, 신앙과 운동의 경계에서 사람들을 이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고유한 역할을 넘치게 다해온 이들이다. 그래서 그 빈자리는 유독 크고 아프다. 동시에 뒤늦게나마 떠난 이들이 각기 다른 삶의 자리에서 감당해왔을 고독의
크기를 헤아려보게 된다. 나는 그 곁에 잠시 머물렀을 뿐 외로움을 나눌 수 있는 동료가 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마음을 짓누른다.

한편 천주교 신자였던 변희수 가브리엘라와 육우당 또한 교회 안팎의 경계에서 자신의 존재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애썼으나, 우리가 끝내 지켜내지 못한 이름들이다. 비록 자신만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던 이들은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들이 만들어가고자 했던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길은 남은 이들의 몫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기억과 추모 속에 되새겨지는 이 부채감을 더 넓고 깊은 연대로 전환하며, 우리가 떠나보낸 이들이 남겨둔 그 자리에서 다리 놓기는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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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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