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끝내고 춘천 두 번 찾은 정약용
큰형 정약현 아들 혼사로 첫 방문
장남·장손과 함께 10박 11일간 머물러
유람길 곳곳에 숨겨진 ‘이벽의 자취’
이벽 후손들이 살고 있던 마적산 일대
조카와 손자 모두 춘천 여성과 혼인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워
신자들의 혼인 네트워크 아니었을까
이 글은 춘천의 평신도인 엄주언 말딩(嚴柱彦, 마르티노, 1872-1955)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엄말딩의 생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과 춘천의 천주교 역사로 시작해 볼까 한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정약용이다. 두 사람의 생몰연대는 두 사람의 삶이 동시대에 교차된 지점이 없음을 이야기한다. 정약용은 1836년에 생을 달리했고, 엄주언은 1872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주언이 궁벽한 시골이었던 춘천에서 어떻게 천주를 만날 수 있었는지를 우리는 다산의 두 번에 걸친 춘천 여행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박해 피해 강원도 산골로 숨어든 이들
춘천의 천주교 역사는 한국 천주교사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성당의 역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의 닳고 닳은 발뒤꿈치가 남긴 역사였다. 박해를 피해 강원도의 산줄기 안쪽으로 숨어든 이들이 있었고, 이름을 낮추고 숨을 죽인 채 겨울을 건너며 기도를 배운 이들도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많은 신자가 경기도와 강원도 산골로 숨어들었고, 강원은 지도 위의 점이 아니라 두려움의 은신처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때의 강원은 ‘선교의 전초기지’라기보다, 숨을 곳이 필요했던 사람들의 피난처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보면 강원도는 은신하기 좋은 ‘산골’이자 ‘변두리’였다. 실제 춘천은 조선 중기 신흠, 김수흥 같은 유학자들이 유배되었을 만큼 궁벽한 땅이었으니, 박해를 피해 교우촌을 만들거나 단독으로 숨어 살기에도 알맞았을 것이다. 당시 교우들이 산간벽지와 경계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버티는 신앙 형태를 오래 유지했던 것처럼, 춘천의 교회 역시 ‘은신’으로 시작해 ‘정착’으로 자라났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정약용의 춘천 여행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계에는 정약용이 유배에서 돌아온 뒤 은신하며 신에 귀의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학계에서는 그가 춘천·화천·청평사 일대를 유람하고 책을 남긴 사실을 들어 단순한 은둔 서사는 무리라고 본다. 나는 이 논쟁의 틈에서 훗날 엄주언이 천주교를 접하게 될 춘천의 ‘그때’ 공기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은신과 유람, 침묵과 기록이 같은 강물 위를 흘렀을지 모른다.
정약용은 오랜 유배를 끝내고 고향 마재로 돌아온 뒤, 두 번이나 나룻배를 타고 북한강 물길을 따라 춘천을 찾았다. 첫 번째는 1820년 59세 때였다. 큰형 정약현의 둘째 아들 정학순의 혼사를 빌미로 길을 나선 그는 소양정 근처에 배를 대고 청평사까지 들러, 이자현의 은둔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때 지은 시들을 포함한 기록은 「천우기행권」에 남겼다.
정약현이 어떤 인연으로 춘천 가문과 사돈을 맺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은 정약현 가문을 둘러싼 천주교의 기척이다. 큰딸 정난주는 ‘마리아’로 세례를 받았고, 사위 황사영은 백서사건을 일으켰다. 처남 이벽은 한국 천주교 정착의 핵심 인물로 거론된다. 정약현이 신자였다는 직접 기록은 없지만, 딸의 개종과 사위의 혼인을 막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어도 배척하지는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연결이 있다. 정학순이 혼인한 여성은 춘천 천전리 이현방의 딸이었다. 천전리는 춘천 북동부, 마적산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다. 이 지역은 놀랍게도 이벽과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이벽의 고향은 포천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선대가 마적산 아래와 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벽의 10대조 지퇴당 이정형은 광해군 대에 춘천으로 이주한 인물로 전해지며, 지금도 천전리 샘밭성당 근처엔 ‘지퇴당 이정형 사당’이 자리한다. 그가 한때 춘천의 문암서원에 배향되었다는 사실도 이런 인연을 뒷받침한다.
지퇴당 이정형 사당 본당.
마적산 일대서 느껴지는 천주교의 기척
지금도 마적산 일대에 이벽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전염병으로 이벽이 갑자기 죽은 뒤, 그의 일가들이 포천에서 친척들이 사는 천전리로 옮겨왔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떠올려볼 수 있다. 이벽의 아들로 알려진 이현모(초명 현개)를 둘러싼 적서 논란과 승적 기록의 진위 문제는 여기서 깊이 파고들지 않겠다. 다만 ‘마적산 아래에서 후손들이 가계를 이루어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춘천 천주교의 초기 풍경을 상상하게 만든다.
1981년과 2013년 변기영 신부 등이 이현모 묘에 참배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땐 묘역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확정되지 못한 상태로 보인다. 이는 천주교 쪽에서 관심을 갖고 조사·발굴할 여지는 분명 있어 보이는 대목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정약현이 굳이 마재에서 먼 춘천, 그것도 중심부가 아닌 변두리 시골 가문과 사돈을 맺은 선택이 단순한 우연처럼만 보이지 않는다. 심증에 불과할지라도, 정약용·정약현 형제가 천주교와 아주 멀리 떨어진 삶을 살지 않았을 가능성을 남겨둔다.
이듬해 정약현은 세상을 떠났고, 정약용은 큰형의 묘비명을 직접 썼다. 동생들로 인해 무너질 수도 있었던 가문을 지켜낸 형에 대한 존경과 애틋함이 문장 곳곳에 배어 있다. 그리고 1823년 정약용은 다시 춘천을 찾는다. 장남 정학연, 장손 정대림과 함께한 길이었다. 손자며느리 집에 혼인을 구하기 위한 여정이었고, 그는 작은 배를 마련해 협곡으로 들어가려는 대림을 따라나섰다고 적었다. 춘천에 도착한 정약용은 봉의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우두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소양정 강가에 배를 대고 6일간 머물렀다.
그 사이 정학연은 사돈을 맺은 최씨가로 납채를 치르러 갔고, 정약용은 화천 곡운구곡까지 유람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문암서원에 들러 하룻밤을 보냈는데, 정약용은 기록에 이정형이 만년에 춘천에 거주했음을 직접 밝히기도 한다. 다시 소양나루로 돌아온 날은 1823년 4월 24일이었고, 이틀 만에 사리담에 도착했으니 약 10박 11일의 여정이었다. 그는 이 기록을 제자 김종의 도움을 받아 「산행일기」로 정리했다.
여기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지명이 손자의 처가가 있었다는 ‘도정촌(陶井村)’이다. 「관동지」에는 도정촌이 “춘천부 관아로부터 북쪽 20리 지점의 저수지 마을”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지내저수지와 연결되는 지내리로 보인다. 지내리는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천전리와 맞닿아 있어, 이 일대 역시 이벽 후손들이 거주하였고, 천주교인들의 혼인 네트워크와 맞물려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벽 후손들의 묘지가 마적산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다는 전언도 이런 상상을 부추긴다.
조카와 손자가 모두 춘천 변두리, 마적산 주변의 천전리와 지내리 여성들과 혼인한 것이 단순한 우연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신유박해 이후 곳곳에 숨어 살며 일가를 이룬 교인 가문들과 연을 이어갔다고 보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조카의 혼사로 춘천에 들렀던 정약용이 천전리 인근에 머물렀다는 정황이, 다산이 이벽의 족형제이자 오랜 지인인 이목에게 준 시 「마적산, 두보의 ‘녹두산’에 화답하다: 馬跡山? 和〈鹿頭山〉」에 남아있다.
물론 이 시의 해석은 분분하다. 다만 그가 머문 곳으로 마을 사람들이 문안 오고, 아이나 어른이나 예절이 바르다며 품성을 칭찬하는 대목은 묘하게 따뜻하다. 더 흥미로운 건 ‘사마휘’의 언급이다. 표면상으론 사마휘를 말하지만, 사마휘 대신 이벽을 대입해 읽으면 결이 달라진다. 둘 다 ‘덕조(德操)’라는 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벽을 노골적으로 언급하기 어려운 부담 속에서, 사마휘라는 가면으로 스승의 그림자를 불러낸 것은 아니었을까.
이벽의 자취를 따라서
두 번째 춘천 여행의 큰 사건은 곡운구곡 유람이었지만, 여행기에는 이격·이벽·이석 형제의 농장과 이격의 별장이었던 ‘지암정자’, 그리고 이격이 절도사로 부임할 때 소를 타고 지나갔다는 절벽길 같은 흔적들도 등장한다. 어쩌면 이 길은 풍경을 보기 위한 여행이기보다, 풍경 속에 숨은 이벽의 자취를 더듬는 여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기록을 통해, 천주교인들끼리의 혼인, 곧 ‘통혼’이 이미 그 무렵 어느 정도 일반화되고 있었을 가능성까지도 조심스레 떠올려 볼 수 있다. 정약용의 두 번의 춘천 여행은, 그렇게 ‘길’이면서 동시에 ‘연(緣)’의 이야기로 남으며, 훗날 엄주언이 천주를 믿게 된 인연까지 연결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