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6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바다를 메운 땅 위에 기도와 후원으로 세운 삼봉공소

[리길재 기자의 공소를 가다] 11. 대전교구 당진본당 삼봉공소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대전교구 당진본당 삼봉공소는 1979년 서울대교구 후암동본당 교우들의 지원으로 지어졌다.

대전교구 당진본당 삼봉공소는 충남 당진시 석문면 대호만로 1701-20에 자리하고 있다. 당진 석문면에는 삼봉공소와 함께 초락도공소(본보 2026년 1월 7일 자 1847호 참조)가 있다.

삼봉공소가 자리한 삼봉리(三峰里)는 이 지역에 세 봉우리로 된 삼봉산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상삼봉(上三峰)·하삼봉(下三峰)·대삼봉(大三峰)과 웅포(熊浦) 땅 일부를 병합해 석문면에 편입됐다. 삼봉공소는 마을 동쪽으로 석문국가산업단지, 서쪽으로는 초락도공소, 남쪽으로는 고대면 성산리, 북쪽으로는 경기도 안산 및 화성과 접해있다.

삼봉공소 일대는 초락도공소와 마찬가지로 원래 어촌이었다. 1970년대 삼봉 제1·2 제방이 쌓이고, 1980년대 대호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지역 일대가 간척 사업을 통해 농촌으로 변했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리던 사람이 농사를 짓게 된 것이다.
공소 내부. 흰색 벽체와 윤이 날 만큼 깨끗한 마루 바닥이 이곳 교우들이 이 공소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잘 드러낸다.

서해 간척의 역사 위에 세워진 신앙 공동체

근·현대 당진의 간척사업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시작했다. 이 간척사업은 보편 교회와 연대한 가톨릭 구호사업의 하나로 시행된 것이다. 당진 지역 가톨릭 구제회 구호사업은 6·25전쟁 기간 주로 식량·의류·의약품 등을 제공했다. 이후 1950년대 말까지는 농지 개간·주택 건설·교육 지원 등에 집중한 시기였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 교회가 사업을 주도하고 가톨릭 구제회가 지원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 지역 주민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농지를 조성해 지역민들의 가난을 해결해주기 위해 교회가 당진에 간척사업을 펼쳤다.

이 가톨릭 구호사업과 간척사업은 제5대 당진본당 주임 유인성 신부가 1952년 부임해 단계적으로 추진되다 1965년 14년 4개월 만에 공주본당으로 인사 이동하면서 잠정 중단됐다. 1970년대 중반에 사업 주체가 일반 기업체로 바뀌면서 당진의 간척사업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이 간척사업의 결과 중 하나가 석문면 삼봉공소와 초락도공소의 탄생이라 할 수 있겠다.

충청남도 15개 시·군 가운데 당진·아산·서산·태안·홍성·보령·서천 등이 바다와 접해 있다. 그래서 세금을 바치는 곡식을 운송하는 뱃길 곧 ‘조운로(漕運路)’가 발달했다. 조선 왕조는 내륙의 공주목과 구분하기 위해 바다와 접해 있는 충청도 여러 고을을 ‘홍주목’에 속하게 하고, 홍주목 고을을 ‘내포’라 불렀다.

오늘날 당진 원산도는 충남 보령 오천면 원산도, 안흥정상구미포는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옛 안흥항, 서근포는 태안군 소근진성, 난지도는 당진군 난지도이다. 이 조운로 일대는 삼국시대 때부터 당나라와의 원활한 교역과 빠르고 안전한 뱃길 개척을 위해 간척사업이 지속돼 왔다. 조선 시대 당진에서 임금에게 바친 진상품은 절인 숭어와 절인 전어였다.

아울러 조운로는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서양 선교사들의 밀입국로로, 또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피난로로, 교우촌 간의 비상 연락로로 이용됐다. 서해안 여러 곶 안 마을에 은신처와 교우촌이 들어선 것도 같은 이유다.
공소 머릿돌. 서울대교구 후암동본당 교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공소 마당 옆에 설치돼 있는 야외 성모상이 단아하다.

서울 후암동본당 신자들의 후원으로 봉헌

삼봉공소는 당진본당 관할 공소 가운데 비교적 늦게 설립된 공소이다. 삼봉공소는 1977년 2월 중순 백 막시마 자매가 농가의 방 한 칸을 빌려 교우 15명과 임시 공소를 시작했다. 이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도 공소 건립 기금 60만 원을 모금하고 1320㎡ 공소 부지를 매입하는 등 공소 건립에 헌신했다. 공소 교우 수도 60여 명으로 늘었다.

그러던 중 “개인의 성화보다는 공동체의 발전을, 받는 것보다는 나눔을 실천하자”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권고를 실천하고 있던 서울대교구 후암동본당 교우들에게 공소 건립을 위해 애쓰고 있던 삼봉공소의 사연이 전해졌다.

당시 서울 후암동본당 주임 김정진 신부와 교우들은 교구의 벽을 넘어 1979년 1월 삼봉공소 건립 지원을 약속했다. 당진본당 주임 김병재 신부와 본당 교우들도 삼봉공소 건립에 힘을 보탰다. 공소 건립 사업은 급진전해 1979년 4월 기공식을 하고 그해 12월 1일 교구장 황민성 주교 주례로 공소 축복식을 거행했다.

삼봉공소는 햇살이 온종일 비치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너른 마당과 공소를 감싸고 있는 숲이 청량감을 안겨준다. 132㎡ 규모의 장방형 강당식 하얀 공소와 적벽돌 종탑이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어느 하나 감추는 것 없이 환하게 드러내는 개운함, 바람에 부딪히는 잔가지들의 나지막한 외침마저 삼키는 고요함이 ‘은수 기도처’인 양 신비롭다.

공소 건물 머릿돌에는 “본 성당은 서울대교구 후암동본당 신자들의 후원으로 봉헌됨. 1979년 12월 1일 황민성 주교님께서 축성”이라는 글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삼봉공소 제단. 나무 제대를 중심으로 특별한 장식없이 단아하게 꾸며져 있다.

사순 시기 십자가의 길 기도 전통 이어와

공소 내부도 밝다 못해 환하다. 흰색 페인트로 깔끔하게 칠해져 있고, 마룻바닥도 천장 조명이 반사될 만큼 윤이 난다. 제단은 회중석보다 3단 높게 만들어 구분했고, 나무 제대와 독서대만 단조롭게 설치돼 있다. 제대 뒷벽 중앙에는 십자가가, 그 옆에는 ‘자비의 그리스도’ 성화가 걸려 있다.

양쪽 벽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돼 있다. 삼봉공소 교우들은 1995년부터 지금까지 사순 시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 십자가의 길 14처 앞에서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있다. 많을 때는 수십 명이, 적을 때는 단 한 명이라도 공소에 와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했다. 이 전통은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단 한 번도 깨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삼봉공소 사순 시기 십자가의 길 기도 전통이 시작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공소 교우 중 열심한 한 젊은 새댁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가 생기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새댁이 너무 안쓰러워 공소 교우들이 마침 사순 시기가 시작되자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그래서 1995년 재의 수요일부터 교우들이 모여 십자가의 길 기도를 했고, 그해 새댁에게 아이가 들어섰다고 한다.

‘아는 만큼 본다(tantum videmus quantum scimus)’는 라틴 속담이 있다. 당진본당 삼봉공소는 ‘나누고 기도하는 만큼 은총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묵묵히 증언하는 은수처이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바로잡습니다.

1844호 2026년 1월 25일 ‘흥업본당 술미공소’ 기사 중 “최해성과 최 비르지타는 최한기 가족의 후손이며 풍수원에서 원주 서지로 이주하였다”는 내용이 명확한 자료 근거와 행적에 부합하지 않아 이를 바로잡습니다. 그리고 ‘배론’을 ‘곳댕이’로 정정합니다.

아울러 1838호 2025년 12월 14일 자 ‘구곡본당 후리사공소’ 기사 중 ‘매지리로 이주한 한 무리의 일가’가 ‘금대 이가환의 일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2-25

관련뉴스

말씀사탕2026. 2. 26

시편 94장 14절
정녕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당신 소유를 저버리지 않으시도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