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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들려오는 침묵의 음악 [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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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과 시험을 겪으신 사건을 기념하는 시간이다. ‘사순(四旬)’이라는 말 자체가 ‘마흔’을 뜻하며,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중요한 사건을 앞둔 준비와 정화의 기간을 상징한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시나이산에서 40일을 지냈고, 엘리야 역시 호렙산으로 향하는 길을 40일 동안 걸었다. 광야에서의 40일 역시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기존의 삶이 해체되고 새로운 사명이 태어나는 과정을 의미한다.

선지자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향했던 광야는 일상 질서가 완전히 사라진 공간이다. 광야에 홀로 고립되면 유혹과 두려움·절망·지독한 향수에 시달리게 된다. 유목 민족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이 ‘광야로의 추방’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그 공포와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극한의 고행 속에서 얻는 자기 정체성은 단순한 깨달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비상을 만들어낸다.

문학에서 광야는 오래전부터 빼어난 소재다. 특히 ‘황무지’로 대표되는 T.S. 엘리엇의 시 세계는 현대 문명의 정신적 광야를 상징한다. 그가 말하는 ‘오지 않는 비’는 구원의 부재를 뜻하며, 파편화된 시어들은 20세기 문명의 분열과 붕괴를 드러낸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문학은 더 이상 선형적 서사를 고집하지 않고, 구조·파편·인용이 중심이 되는 현대적 글쓰기로 나아간다.

프랑스의 올리비에 메시앙은 작품 ‘기도(Oraison)’에서 광야에서의 기도와 침묵을 극단적으로 느린 시간 속에 담아낸다. 이 음악에는 멜로디를 따라가려는 욕망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고독과 갈구가 묘하게 얽혀 들을 때마다 심연의 외로움을 불러낸다. 유리를 공명시킬 때 들리는 듯한 소리, 공기 자체가 떨리는 것 같은 음향은 음악의 ‘바깥’이 아니라 ‘안쪽’으로 끌어들인다.

메시앙 - 기도


러시아 출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시편 교향곡’에서 흔히 말하는 ‘비 없는 기도’, 즉 황무지적인 종교성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그는 작품의 첫 장에 “신의 영광을 위해 작곡된 교향곡”이라는 문구를 적어넣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편성이다. 스트라빈스키는 교향곡에서 가장 윤택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악기군인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그 결과 따뜻함 대신 메마름을, 풍요 대신 고독을 들려준다.

네덜란드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폴란드 작곡가 헨릭 구레츠키는 ‘교향곡 3번’에서 절규 이후의 텅 빈 공간을 형상화한다. 이 작품은 발표된 지 14년이 지난 1991년 빌보드 클래식 차트에 등장해 무려 31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50분을 넘기는 연주 시간과 세 악장 모두 ‘렌토(Lento, 아주 느리게)’로 진행되는 작품이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킨 사실은 기적 같다. 이 음악은 흔히 ‘슬픔을 치유하는 음악’ ‘고독을 넘어서는 기도’로 불린다. 적막한 광야를 가로질러 다가오는 주님의 발걸음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펜데레츠키가 지휘하는 구레츠키의 ‘슬픔의 노래’


 











작곡가 류재준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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