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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장수 책 두 권이 바꾼 운명… 춘천 산골에 신앙공동체 일구다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춘천의 엄주언 말딩, 1920년 기적을 만들다 - (2) 체장수의 책, 엄말딩의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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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시 신북읍에 자리한 천전리 샘밭성당 전경. 이 지역은 박해를 피해 교우들이 교우촌을 이룬 곳이었고, 엄주언은 이곳을 왕래하던 체장수를 통해 신앙 서적을 접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천주실의」 「주교요지」 읽고 깊은 감명
어려서 영특했고 한학 익히며 성장
천진암 머물며 교리 배우고 세례 받아


돌아온 고향에서 냉대가 존경으로
화전 일구고 밤엔 교리·성경 가르쳐
‘장차 큰일 할 사람’ 칭송이 자자



춘천, 자생적 신앙의 터전

앞선 연재에서 신유박해(1801) 이후 많은 천주교인이 춘천으로 숨어들거나 정착해 살았을 가능성과 그 증거로 정약용의 두 번의 춘천 여행을 살펴보았다. 그 정황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사례로 ‘황심 추국 사건’을 들 수 있다. 황심은 1797년부터 세 차례나 조선 교회의 서신을 북경 주교에게 전달했고, 1801년에는 배론에서 황사영을 만난 뒤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춘천에서 처형당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신유박해 때 황심이 가족과 함께 춘천 북산면 쪽으로 옮겨 살다가 화를 입었다는 점이다.

북산면은 이벽 후손들이 살던 천전리와 북쪽으로 맞닿은 지역이고, 마적산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의 동네들이다. 즉 “춘천에도 교우들이 있었다”는 말이 전설처럼 떠도는 게 아니라, 박해의 서늘한 그늘이 실제로 이 산골까지 내려왔다는 뜻이 된다. 그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춘천이 자생적으로 신앙의 씨앗을 품어 온 터전이었음만은 분명해 보인다. 더구나 1880년대 춘천의 교우촌이나 공소를 언급한 기록에서 천전리 ‘샘밭’과 인근 지명이 반복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믿음은 꺼지지 않고, 오롯이 남아 있었던 셈이다.


운명적 만남: 체장수와 두 권의 책

이제 여기서 평신도 엄주언의 삶이 어떻게 시작될 수 있었는지가 비로소 설명된다. 곰실본당(1920)을 ‘춘천 천주교의 출발점’으로만 부르는 말이 얼마나 성급한지, 그 말의 뒤에 숨은 시간의 층이 얼마나 두꺼운지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두꺼움 위에 우뚝 선 사람이 엄주언(嚴柱彦, 마르티노, 1872~1955)이었다.

엄주언의 출생은 기록과 기억이 서로 어긋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1873년 1월 8일(음력 1872년 12월 10일) 태어났고, 출생지도 한동안 동면 장학리 노루목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서면 월송리 출생으로 알려지면서 ‘어디서 태어났는가’의 좌표가 흔들렸다. 나는 이 흔들림이 오히려 진짜 같다고 느낀다. 박해의 끝물, 가난한 농촌, 평신도의 신앙의 길은 늘 공식 문서보다 구전과 가족 기억에 더 많이 기대어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한 가지는 비교적 고르게 전해진다. 그는 어려서 영특했고 한학을 배우며 글에 기대어 자랐다는 점이다.

그의 내면을 바꾼 결정적 계기는 열아홉 무렵에 찾아온다. ‘체장수’의 권유로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 멈칫하게 된다. 어떻게 일개 체장수가 그런 책을 품고 다녔을까. 그리고 그 위험한 책을, 하룻밤 묵어가는 주인집 젊은이에게 선뜻 권할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은 앞에서 살핀 ‘춘천의 오래된 교우촌’이라는 배경을 놓고 보면 조금씩 풀린다. 천전리 샘밭과 인근에 교우촌·공소의 흔적이 이어져 왔다면, 천주교인이었던 체장수는 그 지역과 왕래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월송리는 천전리와 멀지 않고, 북한강이 사이에 있었지만 충적지와 옥산포에서 배를 통해 쉽게 오가던 지척이었다. 장터와 마을을 잇는 길 위에서, 책 한 권은 때때로 사람보다 더 멀리 이동한다. 체장수는 그 길을 가장 자주 걷는 타인이었다. 툇마루에 앉아 체를 손보며 세상 소식을 엮는 사람, 어느 날은 체 대신 얇은 책 두 권을 봇짐에서 꺼내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엄주언이 느꼈을 충격은 전승 속 탄식 한 줄로 남아있다.

“세상 부모도 공경 못 하면 불효의 죄를 짓는 것인데,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지으신 천주님을 모르고 미신을 섬기며 살아왔으니 이를 어쩌면 좋은가!”

이 문장은 묘하게 낯익다. 남인 선비들이 서학을 ‘지식’으로 접하다가 어느 순간 ‘신앙’으로 넘어가며 삶이 통째로 흔들리던 그 전환과 닮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약종의 「주교요지」는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이들에게 빠르게 길을 열어준다. 책은 머리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붙잡아 끌고 가기 때문이다.

 
「천주실의」. 엄주언 등과 같은 초기 신앙인들은 「천주실의」,「주교요지」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뒤 신앙 공동체 형성에 기여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마음 속 성지 천진암에 가다

그 뒤로 엄주언은 아마 체장수를 기다렸을 것이다. 봇짐에 체만 담은 사람이 아니라 질문과 답을 담아 다니는 사람, 어쩌면 스승이자 인도자였을 것이다. 이야기들이 쌓일수록 젊은 마음은 ‘보고 싶다’는 쪽으로 기울었을 것이다. 신앙이 자라나면, 신앙은 발 딛고 설 자리를 찾는다. 신과 관련된 장소(천진암), 사람(이벽과 정약용 형제들), 그리고 흔적들 말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천진암으로 향한다. 1891년 무렵, 엄주언은 직접 천진암을 방문했다. 한때 천주교의 요람으로 기억되었으나 박해가 거세지던 당시 스님들까지 처형당하고 폐찰된 채 방치되었던 곳이다. 그 ‘마음속 성지’가 현실의 길로 다시 열리기 시작한 건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신앙의 자유가 일정 부분 허용되면서부터다. 엄주언이 천진암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역사적 ‘틈’ 덕분이었다.

이후 그는 천진암으로 이주하자고 가족에게까지 제안했으나 두 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몇 해 뒤 반대하던 두 형이 세상을 떠나자, 1893년 그는 맏형과 함께 천진암까지 두 발로 걸어가 한 달을 머물며 교리를 배운다. 그해 늦가을에는 막 가정을 꾸린 아내 윤희자(아가타)를 포함한 가족 7인을 이끌고 아예 천진암으로 터전을 옮긴다. 가족들은 움막 같은 거처에서 어렵게 신앙생활을 이어갔다고 전한다.

여기서 하나의 논쟁점이 남는다. 엄주언의 영세(세례) 시기와 집전 사제 문제다. 전승에는 1894년 엄주언이 형과 함께 프랑스 사제 ‘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다만 1894년 당시 성이 ‘목’인 프랑스 선교사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이를 리굴로(A. P. Rigoulot, 목) 신부와 연결하는 추정도 있으나, 그는 1897년 9월 26일 사제품을 받고 1898년 1월 5일 입국했기에 1894년의 집전과 맞지 않는다.

따라서 영세 시기가 1894년이 맞는다면 집전자는 리굴로가 아닌 다른 선교사였을 수 있다. 그동안 두세(C. E. Doucet, 정가미) 신부일 가능성도 거론되었으나, 개인적으로는 산간 전교 활동과 1890년대 전후의 행적을 고려할 때 조제프 알릭스(Josheph Alix, 한약슬) 신부가 세례를 줬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불분명함이 그의 삶을 흐리게 하진 않는다. 누가 세례를 줬는가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왜 그 길을 택했는가’이기 때문이다.


냉대 이겨내고 고향 춘천에 정착

엄말딩은 천진암에서 3년을 보낸 뒤 고향 춘천으로 돌아오지만 기다린 것은 환대가 아니라 ‘천주학쟁이’라는 냉대였다. 거처를 장학리 노루목으로 옮겨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처가 친척의 도움으로 대룡산 자락 고은리 윗너부랭이의 폐가를 사서 이주한다. 쌀 한 가마, 콩 두 가마를 빌려 연명하고, 떡갈나무 잎을 따 죽을 쑤어 먹으며 화전을 일구었고, 이웃의 놀림과 수모도 견뎌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무너지지 않는다. 금주하며 근검하게 살았고, 밤이면 글을 아는 이들을 모아 교리와 성경을 가르쳤다. 한학을 배운 사람의 힘은 지식이 아니라 ‘매일의 습관’으로 드러난다. 생활이 곧 설교가 되고, 절제가 곧 신앙의 언어가 된다. 시간이 쌓이자 사람들은 그를 대할수록 존경을 품기 시작했다. ‘장차 큰일 할 사람’이라는 칭송이 늘어났다는 전언이 괜히 나온 건 아니었던 것이다.

곰실의 첫 씨앗은 거대한 성당이 아니라 이런 습관과 생활에서 시작되었다. 엄주언은 단지 ‘신자가 된 사람’이 아니라, 신앙을 공동체의 형식으로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책으로, 이야기로, 발걸음으로 옮겨 다니던 믿음이 마침내 춘천의 한 산골에서 ‘삶의 방식’으로 싹튼 것이다. 그리고 그 싹은 굵은 줄기가 되어 공소라는 이름과 강당이라는 공간을 얻고, 마침내 문서 속 역사로 자리를 잡게 된다. <계속>

 


이현준(프란치스코, 한림대 강사)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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