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딸 엘리사벳이 첫영성체를 거부했습니다. 기도문을 외워서 확인받고, 성경 필사를 제출해야 하며, 일주일에 두 번씩 수업을 듣고 신부님 앞에서 구술시험을 치러야 하는 과정에 중도하차를 선언했습니다.
다섯 살에 말문이 트이고 아홉 살에 한글을 깨친 엘리사벳이 열 살에 그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이 친구들과 함께 첫영성체를 하고 싶어 했기에 권한 것이었습니다.
첫영성체 준비 과정의 절반이 지났을 무렵, 열심히 참여하던 엘리사벳은 악몽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꿈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했습니다. 곧 아우구스티노가 담당 신부님과 면담했으나 신부님의 입장은 완고했습니다. 반드시 기도문을 전부 다 외우고 필사를 마치고 구술시험을 치러야 첫영성체를 받을 수 있다는 답변만 반복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엘리사벳은 첫영성체는 물론, 주일미사까지 거부했습니다. 다시는 성당에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 클라라 역시 열 살에 첫영성체를 거부했습니다. 이미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는데, 그것을 승인받기 위해 그렇게나 많은 것을 해야만 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어린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성당의 모습은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여섯 살 유치원에서 그토록 커 보였던 수녀님이 왜 성당에서는 작게만 보이는 건지, 왜 성당의 정중앙 십자가 아래는 항상 신부님의 차지이고 단 한 번도 수녀님께 양보하지 않으시는 건지, 왜 미사 중 말을 하거나 글을 읽는 일은 신부님과 같은 남자들이 하고, 여자들만 미사포를 쓰고 있어야 하는 건지…. 일곱 살, 여덟 살, 아홉 살의 클라라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열 살의 클라라는 더는 성당에 가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니, 열 살의 클라라와 엘리사벳이 교회를 거부했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질문은 모든 공부의 출발점이므로, 교회에 대해 “왜?”라고 묻기 시작한 바로 그때부터 신앙 공부는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십 대를 교회 밖에서 보내며 알게 되었습니다. 차별하고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세계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그 이후로 저는 교회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거듭 질문하며 살아왔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가르치기보다 먼저 말을 걸고, 믿음을 요구하기보다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십니다. 당시 기준으로 예수님은 네 겹의 경계를 넘으셨습니다. 여자와 남자 사이의 경계, 사마리아인과 유다인 사이의 경계, 도덕적으로 낙인찍힌 여성과 라삐 사이의 경계, 그리고 침묵해야 한다고 여겨지던 사람과 신앙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사람 사이의 경계였습니다.
경계를 넘는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 교회의 문안으로 성급히 들어가기보다, 교회의 문 앞에 서서 어린이의 시선으로 교회를 이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싶습니다. “왜?”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으며, 경계에 서서 신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