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 대천본당 은포리공소는 유서 깊은 하부 내포 지역 보령 주교면에 자리하고 있다. 은포리공소 전경.
가장 혹독한 박해를 견뎌낸 순교의 터전
대전교구 대천본당 은포리공소는 충남 보령시 주교면 외평길 133-66에 자리하고 있다. 주교면은 보령시 중서부 해안 지역으로 김 양식이 활발하고, 대천 간척사업으로 너른 농경지를 확보한 덕분에 농업도 성행한다. 보령 주교면 출신으로 유명한 이가 토정 이지함(1517~1578)이다. 그의 무덤도 주교면 고정리에 있다.
충청도 지역 복음 전래 과정을 살필 때 내포 지역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가야산을 중심으로 서쪽 보령·결성·해미, 동쪽 홍주·덕산·대흥·청양, 북쪽 태안·서산·면천·당진 11개 고을을 내포라 소개한다.
또 조선 영조 13년에 영의정을 지낸 이광좌는 서천·면천·서산·태안·온양·홍산·덕산·청양·남포·비인·결성·보령·아산·신창·예산·해미·당진 19개 고을을 내포라 했다. 쉽게 말해 아산만으로부터 태안반도 안흥진을 돌아 금강 하류에 이르기까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이 내포이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1861년 내포 지역을 홍주를 중심으로 ‘상·하부 내포’로 나누었다. ‘상부 내포’에는 홍주·면천·당진·덕산·아산·온양·신창·예산·청양·대흥 고을이, 홍주 서쪽 지역인 ‘하부 내포’에는 태안·서산·해미·결성·보령·남포·비인·서천·홍산 고을이 속했다.
내포 지역은 18세기 중엽 조선의 젊은이들에 의해 조선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될 때 한양과 경기도 일부 지역과 함께 가장 이른 시기에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고 실천했다. 내포 사람들이 가톨릭 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개방성이 크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내포 지역은 금강과 서해안을 끼고 평야와 갯벌이 발달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해 한반도 어느 지역보다도 자원이 풍족하고 농촌과 어촌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또 조운해로를 운영해 조선의 가장 중요한 경제 동맥이었으며, 내포 땅 안면도와 태안반도 해안지대는 외래 신문물 유입에 유리한 지리적 개방성을 갖추고 있었다.
대천본당 은포리공소 제단. 제대와 십자가·감실·독서대로 꾸며져 있고, 양측에 제의실과 준비실을 갖추고 있다.
은포리공소 내부. 양 벽면에 창들을 내어 볕이 낮 동안 따뜻하게 들게 하여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신해박해 때부터 순교의 피로 물든 내포
내포의 가톨릭 교회는 김대건·최양업 신부뿐 아니라 1791년 신해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보령 출신 김한빈(베드로)·김유산(토마스)이 순교했다. 또 순교자 안군심(리카르도)도 보령 출신이다.
김한빈(1764~1801)은 홍주(현 충남 홍성)에서 포수로 지내다가 1800년 서울로 올라와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집에서 행랑살이하면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됐으나 탈출에 성공한 그는 곳곳을 다니며 박해 상황을 수집해 배론에 은거해 있는 황사영(알렉시오)에게 알려줬다. 그의 증언은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하는 데 요긴한 자료가 됐다. 그러다가 황심(토마스)이 체포된 후 황사영의 거처가 밝혀지면서 김한빈은 황사영과 함께 배론에서 체포됐다. 김한빈은 사정을 알고도 숨긴 죄로 1801년 11월 28일(음력 10월 23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김유산(1760~1801)은 충남 보령 역참 마을에서 천민으로 태어났다. 그는 승려 생활을 하다 환속해 홍산(충남 부여군 홍산면)에서 신발을 팔며 살다가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 주로 교우들에게 교회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한 그는 조선 교회 밀사로 선발돼 1798년과 1799년 두 차례 북경을 다녀오면서 성직자 영입 운동에 힘을 보탰다. 신유박해 때 그는 유항검(아우구스티노)·윤지헌(프란치스코)·이우집과 함께 전주에서 체포돼 전주 감영으로 압송됐다. 그는 북경 교회를 왕래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가 반역죄로 기소돼 한양 의금부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후 다시 전주로 이송된 그는 10월 24일 이우집과 함께 참수형으로, 유항검과 윤지헌은 목이 잘린 후 다시 사지를 뜯기는 능지처사형으로 순교했다.
안군심은 애덕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가 처음 체포돼 관가로 끌려갔을 때 관장이 “너는 어찌 사악한 종교를 믿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저는 결코 사악한 종교를 믿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관장은 두 번 묻지 않고 풀어줬다. 가톨릭이 ‘사악한 종교’가 아니므로 자신은 그런 종교를 믿은 바가 없다고 한 것인데 관장은 그것을 배교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일로 안군심은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언젠가 기회가 오면 아주 명확하게 신앙을 고백하기로 하였다. 신유박해가 끝나고 1827년이 되어서야 그 기회가 왔다. 그는 관장 앞에서 자신이 믿는 바를 확실히 고백한 후에 대구 감영에서 8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61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공소 입구 옆에 소박하게 꾸며져 있는 성모상.
은포리공소는 앞에 농지가 조성돼 있고 그 너머로 마을과 야트막한 산들이 감싸고 있다.
1943년 은포리에 가톨릭 신앙 공동체 형성
이처럼 보령에도 초기 조선 교회 때부터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신앙을 위해 순교한 이들이 배출되었지만 1962년이 되어서야 첫 본당이 설립됐다. 바로 대천본당이다. 대천본당은 보령 지역 복음화에 힘써 대천해수욕장본당과 보령 동대동본당을 분가했고, 성지 개발에도 힘써 대전교구가 갈매못과 서짓골 성지를 조성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보령 주교면 은포리에 가톨릭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943년 중국 연길교구 출신 심 베로니카가 이곳으로 이주해와 주민들을 선교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성 베네딕도회 독일 상트 오틸리엔연합회가 관할하던 연길교구는 당시 중국 공산군에 의해 성직자 수도자 납치·감금·추방 등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각 본당에서는 ‘연길·덕원교구 구제금’ 모금 운동을 벌였다. 아마도 심 베로니카 역시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를 피해 은포리로 이주해와 정착했을 것이다. 심 베로니카는 자신이 전교한 이들과 함께 가정집에서 1944년부터 신앙 모임을 했다. 이때 공소가 설립됐다는 글도 있고, 1950년 은포리공소가 설립됐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1961년 한옥 구조의 공소가 세워졌고, 1994년 4월 17일 지금의 벽돌조 건물을 신축해 그해 11월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가 봉헌식을 거행했다는 것이다. 회의실과 주방·회장실 등 부속 건물은 2006년 지어졌다.
은포리공소는 여느 공소처럼 장방형 강당식 구조이다. 공소 앞쪽에 농지가 조성돼 있고 그 너머로 마을과 야트막한 산들이 감싸고 있다. 너른 마당에는 종탑과 성모상이 설치돼 있다. 내부 바닥은 시멘트 타일로, 양쪽 벽면은 흰색 페인트로 마감돼 있다. 양쪽 벽면에 여러 개의 창을 만들어 실내 채광을 밝게 했다.
두 개의 단으로 회중석과 구분해 제단을 꾸며 놓았다. 제단에는 나무 제대와 독서대·감실이 있고, 제대 뒷벽 중앙에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상이 설치돼 있다. 제단 좌·우측에 제의실과 준비실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