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춘천의 엄주언 말딩, 1920년 기적을 만들다 - (3) 엄주언의 발품이 역사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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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실공소 전경.
엄말딩의 진심과 열정
기도 모임 만들고 강당 짓고
금주·금연 등 함께 지키는 규율 세워
‘상주 사제 청하는 공동체’로 성장
‘말’이 아닌 ‘발’로 뛴 전교의 역사
장티푸스로 마을 사람 죽어가던 때
방치된 시신 짊어지고 뒷산 올라…
장례 돕는 헌신으로 주민 신뢰 얻어
춘천의 엄주언에게 ‘전교’는 말의 재주가 아니었다. 공동체를 세우는 기술이었다. 사제도 아닌 평신도 한 사람의 진심과 열정이 신도 몇을 늘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고, 강당을 세우고, 마침내 ‘상주 사제를 청하는 공동체’로까지 밀어 올리는 힘이 되었다. 고은리 곰실의 시간표를 따라가다 보면, 숫자보다 더 선명한 건 언제나 방향이었음을 알게 된다.
1900년 뮈텔 주교 일기에 곰실 사목 기록
‘곰실’이 사료에 또렷이 등장하는 시점은 1900년 전후로 정리된다. 원주본당의 1900~1901년 교세 통계표에 ‘곰실’이란 명칭이 처음 확인되고, 1900년 11월 4일 뮈텔 주교의 일기에도 곰실 사목 방문이 기록된다. 주교는 새벽에 길을 나서 춘천 곰실로 향했고, 큰 집 한 채와 세 가족을 만난다. 그날 고해성사를 본 이는 모두 열 명이었으며, 주교는 하루 동안 열두 시간 가까이 걸어야 했으므로 밤 11시 반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는 여정을 남겼다. 이 기록은 여행기가 아니라 표식이다. 곰실이 이미 교도권의 공식 방문 대상, 말하자면 ‘지도 위에 올라온 공소’였다는 확인서다.
다만 여기서 사람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 등장한다. “곰실이 춘천 최초의 공소인가?” 사료가 말하는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1876~1877년 무렵, 평신도 회장 김기호(요한)와 블랑(Blanc, 백규삼) 신부가 강원도의 일부 공소를 순방하며 춘천의 두 공소를 방문한 기록이 전한다. 또 푸아넬(V. L. Poisnel, 박도행) 신부가 작성한 1884~1885년 교세 통계표에는 춘천의 공소로 각기리(객기리), 새암밭, 다라목이(다라메기), 베들골, 무리울 등이 확인된다. 곰실이 확인되는 1900년 무렵에도 ‘가래골’이라 불리는 공소가 있었던 것으로 서술된다. 특히 정약용이 방문했던, 이벽의 후손이 살았던 천전리의 ‘샘밭’ 명칭은 이른 시점부터 언급된다.
어쨌든 곰실은 최초의 상징이 아니라 ‘성장과 집중’의 상징이었다. 흩어져 있던 춘천 지역 공소들 가운데 곰실이 가장 빠르게 ‘상주 사제’의 필요를 현실의 언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현실을 가장 집요하게 말하고, 청원의 목소리를 높이 들고 다닌 사람이 엄주언 말딩이다.
이 때문에 곰실공소 초창기 신자 수가 17명뿐이었다는 기록은 매우 놀랍다. 이 적은 신자로 ‘어떻게?’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작았지만, 그 작음 속에 ‘밀도’가 있었다. 엄말딩은 밤이면 글을 아는 사람을 모아 교리를 설명했고, 아침저녁 기도를 잊지 않게 했으며, 주일에는 공소예절을 거행하게 했다. 신앙은 개인의 마음에만 머물면 오래 버티기 어렵다. 공동체의 시간표를 가져야 한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 함께 모이는 장소, 함께 지키는 규율이 생겨야 신앙은 ‘습관’이 되고 ‘문화’가 된다. 엄말딩은 그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고, 이를 지켜내려 애썼다.
‘춘천교구의 요람’이라 새겨진 곰실공소 표지석.
신앙이 자랄 ‘공간’을 만든 사람
신자들은 꾸준히 늘었다. 10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 1910~1911년에는 102명에 이른다. 그리고 1913년 4월 4일, 풍수원본당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편지를 올린다. 편지는 간절하고 구체적이다. 춘천 교우들이 “벌써 여러 해 전부터 신부를 갈망”했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이어서 곰실공소가 “매우 아름답고 잘 지은 강당”이라는 평가가 붙고, 교우 99명이 모두 농업에 종사하며 독실하다고 적는다. 더 인상적인 대목은 지리 정보다. 곰실은 춘천읍에서 10리쯤 떨어져 있고, 풍수원 퇴침리에서는 110리. 그리고 근처에는 개신교도들이 많아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공소 목록도 자세히 적어 놓았다. 홍천과 화천의 여러 공소들, 양구 방산, 가평 개무덤이까지. “이 모든 공소들이 100리 이내에 있다”는 문장은, 곰실이 외딴 종교 공동체가 아니라 강원·경기 동부를 잇는 선교의 허브였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런데 이 곰실의 강당은 누가 세웠는가. 기록은 간접적으로 답한다. 1913년 편지에 이미 강당이 언급되고, 1916년 「경향잡지」 1월호에는 공소 부지를 기증한 사람이 엄주언 말딩이라고 언급된다. 신자들이 모일 땅을 내놓고, 모일 공간을 만들고, 모일 시간을 조직한 사람. 엄말딩은 단지 ‘전도를 잘한 사람’이 아니라, 신앙이 자랄 ‘공간’을 만든 사람이었다. 곰실의 신자들은 처음 엄말딩의 집에서 모였으나, 신자 수가 늘어나자 더 큰 공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강당이 세워졌다. 강당은 이내 공동체의 심장이 되었다.
곰실공소 내부.
술·도박·험담 금지한 신앙공동체
엄말딩이 남긴 리더십의 결은 양면적이다. 한쪽에는 따뜻한 돌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단단한 규율이 있었다. 그는 금주와 금연을 권했고, 생활을 절제하게 했으며, 규율을 어길 때는 벌을 주기도 했다. ‘불량자 취체령’을 발동해 ‘양대인(외국인 신부)’ 앞에서 벌을 받게 하거나 50전 벌금, 말꿇림(‘말’과 같은 용기에 무릎을 꿇어 앉혀 고통을 주는 처벌) 같은 공동체적 징계를 주기도 했다. 요즘 감각으로는 거칠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당시 교회가 농촌 마을 안에서 신뢰를 얻는 방식이기도 했다. “저 사람들은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을 단단히 붙들고 산다.” 이러한 인식이 전교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는 술과 도박과 험담이 신앙 공동체를 금세 흩트릴 수 있음을 알았고, 그래서 공동체가 지켜야 할 선을 세웠다.
반대로, 그의 돌봄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장티푸스가 유행해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던 때, 그는 장례를 도왔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시신을 혼자 어깨에 메고 뒷산에 묻어주었다는 증언이 전해진다. 결국 자신도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이 장면은 곰실이 왜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는지 설명해준다. 전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불행을 내 몫처럼 짊어지는 굳건한 행위로 전해진다. 엄말딩의 신앙은 교리책의 문장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노동이었고, 장례였고, 위로였고, 침묵 속의 헌신이었다.
곰실공소 종탑.
시련을 견뎌낸 '기다림의 시간'
이처럼 곰실공소는 성장을 거듭했지만, 상주 사제를 모시는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자들이 신부를 갈망하며 서울로 올라가려 했다는 1913년 편지는 이미 그 간절함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본당 설립이 지연된 배경에는 시대의 사정이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은 한국 교회에도 큰 공백을 남겼다. 일부 선교사들이 소집령으로 귀국하면서 사제 수가 급감했고, 1915~1919년 사이 사제품을 받은 한국인 신부가 많지 않아 공백을 메우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본당을 세우는 일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어 관할구역 조정 문제도 있었다. 1914년 원주본당 조제(J. Jaugey) 신부가 귀국하며 사목 구역이 분할되었고, 그 과정에서 곰실과 장본(샘밭) 같은 공소가 마룡리본당(현 용문본당) 관할로 편입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1919년 10월경 조제 신부가 복귀해 구역이 원래대로 되돌아갈 때까지, 곰실공소는 다른 사목 체계 속에 놓였다. 곰실 신자들의 마음이야 변하지 않았겠지만, 행정과 인력이 받쳐주지 않으니 본당 설립은 어려웠다.
우리는 흔히 공동체의 틀이 완성되지 않으면 흔들리거나 와해되는 역사적 현장을 종종 목격한다. 하지만 곰실은 멈추지 않았다. 길은 막혀도 기도는 이어지고, 사제는 없어도 예절은 계속되고, 강당은 사람들의 발로 닳았다. 엄말딩은 그 사이에도 풍수원과 서울을 오가며 다른 회장들과 ‘상주 사제 파견’을 요청했고, 신자들의 삶을 정돈하며 공동체가 흐트러지지 않게 붙잡았다. 곰실은 그렇게 ‘시간을 버티는 교회’가 된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다. 그 오래된 청원이 마침내 응답받는 순간. 공소가 본당이 되는 날. 곰실의 골짜기가 ‘춘천의 첫 본당’이라는 이름을 얻는 날. 그날이 1920년 9월로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