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춘천의 엄주언 말딩, 1920년 기적을 만들다 - (5·끝) 불타고 다시 세워진 자리, 엄말딩이 남긴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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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죽림동 주교좌성당에 세워진 엄주언 말딩 송덕비. 가톨릭평화신문 DB
전쟁에 불타고, 농촌 쇠퇴에 흔들려도…
그래도 곰실공소는 다시 섰다
엄주언은 ‘사람을 모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일 자리’를 만들었다
“죽은 이의 장사 잘 지내 영혼 구하라”
그의 뜻 따라 막내딸 53년간 장례 봉사
11월 11일 ‘평신도 추념의 날’ 제정
춘천교구 발상지로서 위상 정립
엄주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이 남긴 건 공소 하나가 아니라 ‘지역 교회가 서는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된다. 가난한 농촌에서 신앙을 생활로 옮기고, 규율과 교육으로 신뢰를 쌓고, 끝내 본당을 청원해 1920년에 꿈을 이룬 사람. 그런데 그의 유산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곰실공소는 전쟁의 불길과 농촌의 쇠퇴를 지나면서도 다시 일어섰고, 그 과정에서 평신도 엄주언의 이름은 ‘발상지’의 기억으로 굳어졌고, 마침내 교구의 역사에도 자리하게 되었다.
곰실공소 자리와 지명의 뿌리
이쯤에서 장소를 분명히 돋을새김할 필요가 있다. 곰실공소는 오늘날 춘천시 외곽 동내면 고은리 일대로 설명되고, 현 도로명 주소는 ‘춘천시 동내면 동내로 220’이다. 주교좌성당인 죽림동성당과는 약 8㎞ 거리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적한 농촌이었고, 대룡산(899m)이 병풍처럼 둘러선 지형이다. 그런데 요즘은 도시가 바깥으로 밀려 나오며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빠르게 흐려지고 있다. 강원도청이 고은리로 온다는 변화의 소식까지 겹치면, ‘곰실’이란 이름이 품고 있던 한적함은 더더욱 귀해진다. ‘곰실(웅곡, 고은동)’이라는 지명의 ‘곰’을 동물을 뜻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보통 ‘뒤쪽의 마을’, 또는 ‘신성한 산에 있는 마을’로도 해석한다. 지명은 늘 그렇듯 오래된 생의 숨결을 품은 채 남는다.
춘천교구 죽림동 주교좌성당에 세워진 엄주언 말딩 송덕비 뒤편에는 그의 삶이 기록돼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사람이 모일 자리를 만들다
바로 이 자리에서 엄주언의 ‘곰실공소’가 시작된 것이다. 전술했듯이 엄주언의 노력으로 곰실은 일찍이 천주의 품 안에 있었다. 1913년 정규하 신부의 편지에서 확인되는 “매우 아름답고 잘 지은 강당”이라는 표현은 곰실이 이미 ‘흩어진 가정 신앙’의 수준을 넘어 ‘공동체의 공간’을 갖춘 상태였음을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건물’이 아니라 ‘방식’이다. 엄주언이 세례를 받고 1896년 춘천으로 돌아와 전교하기 시작한 뒤 17년 만에 교우 99명 규모에 이르렀다면, 그 성장 동력은 말이 아니라 생활 속의 설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처음엔 엄주언의 집이 교회당이었지만, 사람이 늘어나며 공간의 필요성이 커졌다. 사람들이 함께 앉을 자리, 함께 들을 자리, 함께 기도할 자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강당이 지어졌다. 결국 엄주언이 한 일은 ‘사람을 모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그의 노력은 1928년 본당에서 다시 공소가 된 이후로도 한동안 춘천본당보다 신자가 많았던 원동력이었다.
6·25전쟁으로 파괴된 죽림동성당. 출처=죽림동성당 70년사
전쟁이 할퀸 자리, 다시 세운 공동체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은 곰실공소에 큰 상처를 남겼다. 교전 과정에서 공소 건물이 폭격을 받아 불타버린 것이다. 불길은 건물만 삼킨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기억, 기도하던 자리, 아이들이 성가를 배우던 바닥, 장례를 치르던 마당까지 모두 타들어 갔다. 그러나 휴전 뒤 신자들은 미군으로부터 목재 지원을 받아 공소 건물을 재건한다. 전쟁 직후 구호 물자가 공소에 지급되면서 이른바 ‘구호품 신자’가 늘기도 했다는 기록은 그 시대의 복잡한 현실을 드러낸다. 굶주림 앞에서 사람은 신앙과 생존을 함께 붙잡으려 한다. 중요한 것은 그런 혼탁한 시간 속에서도 공동체가 ‘자리’를 다시 세웠다는 점이다.
돌봄의 밀도를 높이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은 전쟁보다 더 오래 공동체를 갉아먹기도 했다. 농촌의 구조적 변화가 공동체를 다시 축소시켰다. 인구와 함께 신자는 계속 줄어들었다. 한때 300명에 가까웠던 교세가 1969년에는 75명으로 감소했다는 기록은 뼈아프다. 1980년대에는 공소 건물 지붕이 낡고 담이 무너지는 등 보수 공사가 시급한 문제로 떠오른다. 발상지라는 이름이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신앙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발이 끊기면 기도도 끊기기 쉽다.
이 침체를 되살린 것은 공동체의 거창한 ‘행사’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반복되는 ‘주일의 길’을 통해 이 위기를 이겨냈다. 공소가 위기였던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효자동본당 오세철(가브리엘) 신부는 매주 오전 7시 곰실공소를 방문해 주일 미사를 직접 집전했다. 새벽 미사는 곧 생활의 리듬이다. 그와 동행한 주일학교 교사들은 미사 전에 성가를 지도하고, 미사 후에는 초·중등부 학생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신앙 공동체가 작아질수록 ‘돌봄의 밀도’는 더 높아져야 한다.
효자동본당은 1991년 3월 무릎틀을 제작해 보급하고, 1994년 11월에는 축대·담장·진입로 포장 공사를 하며 낙후된 시설을 개선하였다. 공동체가 다시 숨을 쉬려면, 기도가 모일 자리부터 살아야 한다는 기본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곰실공소’가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엄주언 말딩이 춘천에 새겨놓은 헌신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2021년 11월 춘천교구장 김주영 주교가 죽림동 주교좌성당에서 엄주언 말딩 송덕비를 축복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공소 바로 아래 ‘종 달린 집’
여기서 우리는 다시 엄주언을 떠올린다. 엄주언은 본당이 춘천 죽림동으로 옮겨간 뒤에도 교회 발전에 계속 기여했다. 공소 바로 아랫집에 살며 처마 밑에 종을 달아 사람들을 일깨웠고, 사람들은 그 집을 ‘종 달린 집’이라 불렀다. 그의 신앙은 ‘기도의 말’만으로 남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임종이 가까운 이들에게 대세를 받게 하고, 사망자가 생기면 만사를 제쳐두고 유가족을 위로하며 장례를 치러주었다. 엄주언의 신앙은 ‘돌봄의 몸’으로 증명됐고, 그의 막내딸 엄연섭은 이런 아버지의 길을 팔순을 앞둔 시점까지 이어받았다고 전해진다.
1955년 4월 30일 새벽 마지막 길
그는 1955년 4월 30일 새벽 4시에 선종했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고, 춘천교구 초대 주교인 구인란(具仁蘭, Thomas Quinlan) 주교가 곰실공소에 직접 찾아와 장례미사를 주례하였다. 교인을 대표해 양원봉(루카) 회장이 감동적인 고별사를 작성해 엄 말딩을 기렸고, 이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955년 5월 4일 신자들은 상여를 메고 ‘자개울’(현재 묘지가 있는 곳)에 안장했다. 한 사람의 마지막 길이 공동체 전체의 길이 되는 장면이었던 셈이다.
엄주언의 기억은 가족의 회고 속에서 더 구체적인 살결을 얻는다. 그의 막내딸 엄연섭(루치아)는 2002년 7월호 「경향잡지」 인터뷰(당시 84세)에서 기도하는 낯선 이를 보고 천주교를 알아차린 장면과 “더 배우고 싶다”며 천진암으로 걸어갔던 아버지의 사연을 증언하였다. 앞서 서술된 엄 말딩 삶의 많은 부분이 그녀의 증언으로 채워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엄연섭은 “죽은 이의 장사를 잘 지내 영혼을 구해주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53년 동안 장례 봉사를 했고, 염한 시신만 500구가 넘을 정도로 헌신했다. 엄연섭은 2012년 10월 11일 선종했으며, 마지막 날까지 아버지의 마음을 잇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엄주언이 ‘한 시대의 영웅’이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의 ‘생활 규범’을 남긴 사람이라는 점을 더 선명히 느끼게 된다. 기억은 이야기로만 남지 않고, 습관과 노동으로 전해지기 마련이다.
자개울 엄주언 묘소.
11월 11일, 교구의 기억으로 새겨지다
마지막으로, 이 기억이 교구 차원에서 어떻게 기념되는지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춘천교구는 곰실공소의 역사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기념 장치를 만들었다. 1998년 교구장 장익 주교는 엄주언의 영명 축일(성 마르티노 축일)인 11월 11일을 ‘평신도 추념의 날’로 제정했고, 그해 11월 11일 죽림동 주교좌성당에서 성직자·수도자·신자 1000여 명이 참석한 추념미사가 봉헌되었다. 1999년에는 죽림동성당 옆에 회관을 짓고 엄주언의 세례명을 따서 ‘말딩회관’이라고 명명하였다. 또 2006년 9월 15일에는 곰실공소의 의미를 ‘주교좌본당과 교구 발상지’에 맞게 관할을 조정했고, 2009년에는 내부를 새롭게 단장해 제대·독경대·성미술품 등을 새로 갖추고 11월 11일 현지에서 중창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엄주언은 ‘개인의 덕행’으로 끝나지 않고, 교구의 기념일과 공간 속에 남는 인물이 되었다. 달력 위의 11월 11일은 단지 날짜가 아니다. 가난 속에서 시작해 규율과 교육으로 신뢰를 세우고, 청원과 노동으로 자리를 만들고, 전쟁의 상처를 견디며 다시 일어선 공동체의 시간이 거기 묶여 있다. 그리고 그 시간 속 기억이, 지금도 고은리 대룡산 자락 어디쯤에서 조용히 종처럼 울리고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