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던 이들이 곧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은 언제 생각해도 살벌하고 애처롭다. 고금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사람들의 환호는 종종 질투와 실망의 출발점이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원하는 상을 그려 놓고 열광하다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등을 돌린다. 시대를 막론하고 반복되어 온 모습이다.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를 외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이들이 아니다. 상당 부분 같은 군중이었고,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조차 최후의 순간에 함께하지 못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선택한 믿음이었고 무리의 분위기에 휩쓸린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는 신앙을 통해 자신이 돌봄을 받고 특별히 여겨진다는 경험을 갈구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을 믿으면 잘살게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세상의 삶이란 유한한 것을 나누는 구조이기에, 누군가가 이득을 보면 다른 누군가는 손해를 보기 마련이고, 어느 나라가 잘살면 다른 한편에는 반드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생긴다.
그러나 이단의 논리 구조는 대개 ‘믿음이 현세적인 성공을 가져오고, 그 성공이 곧 믿음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반면 그리스도교 복음의 구조는 전혀 다르다. 믿음으로 주님 뜻에 따라 살며 회개하고, 그 끝에서 부활을 통해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 어디에서도 주님이 현세의 성공을 약속하거나 성공을 부활의 조건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 현세에서의 부와 성공을 위한 신앙이라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예수님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종려나무를 흔들던 이들이 곧 당신의 죽음을 외칠 것을 아시면서도, 그 운명을 거역하지 않고 나귀를 타고 그들 가운데로 들어가셨다. 말이나 낙타가 아닌 나귀를 타고 가신 선택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은 힘과 전쟁·지배를 상징하고, 낙타는 부와 높은 지위를 떠올린다. 반면 나귀는 평화와 겸손, 그리고 일상의 짐을 묵묵히 지는 존재를 상징한다.
구약에도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고 예언되어 있다. 이는 주님께서 세속의 왕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것을 미리 알린 말씀이다. 이렇게 분명히 알려 주셨음에도 끝내 세속의 왕을 기대했던 인간의 어리석음 앞에서 혀를 차게 된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는 관현악곡 「로마의 분수」 중 ‘트레비 분수’ 악장에서 나귀가 끄는 마차 소리를 묘사한다. 그는 나귀를 도시의 화려함을 떠받치는, 평범하지만 중심을 이루는 존재로 그려내며, 찬란한 분수와 대비되는 소박한 생명을 드러낸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향해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로 묵묵히 걸어가던 그 나귀의 발걸음을, 이 곡을 통해 투영해본다.
리카르도 샤이가 지휘한 레스피기의 트레비 분수
//youtu.be/u4beF7X69hM?si=siONBndygT8sZI9U
작곡가 류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