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에 설립해 2008년 지금의 공소 건물을 봉헌한 원주교구 흥업본당 귀래공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만나고 머무는 귀한 성소이다. 귀래공소 전경.
서로 오가며 하느님 실존 체험하고 나누던 곳
원주교구 흥업본당 귀래공소는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운남리 용암말길 42-5에 자리하고 있다. 운남리(雲南里)는 백운산 남쪽 마을을 가리킨다. ‘귀한 분이 오셨다’는 뜻의 귀래(貴來)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 김부(金傅)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여 불리게 됐다 한다.
견훤에 의해 강제로 임금이 된 경순왕(927~935) 김부는 935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기 전에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방학리에 별궁을 짓고 머물렀다. 이때 원주 귀래면 주포리 용화산 산세에 반해 찾아왔고, 딸 덕주 공주가 산꼭대기 바위에 아버지를 닮은 미륵불을 새겼다. 경순왕은 고자암(지금의 황산사)을 지어 이 암자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범종이 울릴 때마다 별궁에서 약 3㎞ 떨어진 화당리 곧 꽃댕이 마을과 귀래면 운남리를 잇는 고개에 올라 미륵불을 향해 절했다. 그래서 이 고개 이름도 ‘절 배(拜)’자를 써서 ‘배재’라 한다.
‘귀래’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는 “평범하게 왔다가 귀하게 되어 간다”는 ‘범인래 귀인거(凡人來 貴人去)’라는 말에서 지명이 유래됐다고 한다.
왕좌에서 내려온 신라 경순왕이 미륵불에 의탁해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며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위해 올랐던 ‘절고개’ 곧 ‘배재’에 500여 년 뒤 또 한 명의 폐위된 임금이 외롭게 섰다. 바로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1452~1455년) 이홍위(李弘暐)이다.
단종은 삼촌인 세조 이유(李?)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1457년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됐다. 단종은 유배지로 가는 길에 이곳 배재에서 한양을 향해 마지막 절을 했다. 단종에게 있어 귀래는 돌아가고(歸), 돌아올 수 없는(來) 딱한 처지의 마을이었다.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대 귀래면과 배재는 험한 산속 깊은 골짜기에 교우촌을 일구고 하느님만을 섬기던 귀한 그리스도인들이 머물고 오가던 길목이었다. 귀래는 인근 부론 서지마을과 백운 꽃댕이·배론 교우촌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오가며 하느님의 실존을 체험하고 나누던 곳이다. 또 그들의 귀한 사목자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걸어가고, 귀한 그리스도인들이 양을 찾아오는 목자를 마중하기 위해 길 위에 서 있던 거룩한 만남과 머묾의 장소였다.
귀래공소는 70대가 넘는 어르신들이 손에 피가 맺히도록 농사일을 하면서 공소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 교구와 본당, 은인들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귀래공소 내부로 늘 햇살이 들어 온화한 느낌이다.
귀래공소 제단. 단조롭지만 예수 성심상과 성모상을 장식해 화려함을 더했다.
‘서지고개길’ 도착지, ‘꽃댕이길’ 출발지
귀래에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부터 정착했는지 알 수 없으나 박해를 피해 인근 산골짜기 곳곳에 교우촌이 들어설 때 이곳에도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 하나의 증거로 조선인 네 번째 사제인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가 귀래에서 고갯길만 넘으면 닿는 충주 소탱이에서 살았다.
독자들을 위해 짧게 정규하 신부를 소개한다. 정규하 신부는 1863년 8월 충남 아산군 신창면 남방제에서 태어났다. 남방제는 병인박해 순교자 조윤호(요셉) 성인의 고향이다. 그는 이곳에서 세 살까지 살다가 마을 사람들의 밀고로 어머니 한 마르타가 체포됐다가 풀려난 후 아버지 정상묵(마태오)에 이끌려 온 가족이 함께 고향을 떴다. 정 신부 가족은 정산과 장호원 등지를 떠돌다 1878년께 충주 소탱이 교우촌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정 신부는 사제가 되기로 했다.
소탱이 집에 불이 나 정 신부 가족은 경기도 광주로 이사했고, 1884년 조선대목구 신학생으로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891년 귀국,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후 1896년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강도영(마르코)·강성삼(라우렌시오) 부제와 함께 뮈텔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이날 서품식은 국내에서 거행된 첫 번째 사제 서품식이었다. 세 신부는 최양업 신부가 1849년 사제품을 받은 이래 47년 만에 탄생한 한국인 사제였다.
정 신부는 곧바로 제2대 풍수원본당 주임으로 부임해 1943년 선종 때까지 이곳에서만 사목했다. 그는 지금의 풍수원성당을 건립하고, 마르코 복음서를 한글로 옮기고, 가난한 이들에게 한글과 신학문을 가르쳤다. 풍수원본당 성체 거동 행사도 정 신부가 처음 시작했다.
귀래공소가 원주교구 주교좌 원동본당 관할 공소로 설립된 때는 1947년이다. 공소 설립 전까지 귀래 교우들은 양안치를 넘어 원동성당까지 걸어가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다시 걸어서 다음 날 집으로 돌아왔다. 변변한 건물이 없어 교우들 집을 돌아가며 공소 예절을 했다. 그러다 2000년에 원주교구의 도움으로 공소 용지 2645㎡(800평)를 매입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귀래공소 교우 대부분이 70~90대 어르신들이었다. 평생 숙원이던 공소 건립을 위해 그들은 40℃가 넘는 비닐하우스에서 마늘 농사를 짓고 주일이면 본당 사제와 함께 미사도 봉헌했다. 또 돌밭을 일궈 옥수수를 심어 수확한 돈으로 성전 건립 기금을 마련했다. 어르신들은 손에 피가 맺힐 정도로 열심이었다. 공소 비닐하우스에 미사가 있는 날이면 할머니들의 가방에는 늘 호미가 들어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라는 잡초를 뽑기 위해서다.
이렇게 10년 가까이 농사를 지어 모은 돈이 3500만 원이었다. 공소를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공소 교우들은 우리 세대에 기둥 하나 세우고 다음 세대에 물려주더라도 제대로 공소를 짓고 싶어 했다. 공소 교우들의 헌신이 통했는지 원동본당과 은인들의 도움으로 2008년 8월에 착공, 그해 11월 26일 새 공소가 완공돼 교구장 김지석 주교 주례로 봉헌됐다.
흥업본당 설립과 함께 관할 공소가 된 귀래공소는 148㎡(45평) 크기의 단층 콘크리트 적벽돌 건물로, 건축비 1억 5600여만 원이 들었다. 산비탈 양지바른 곳에 들어선 귀래공소는 온종일 햇살이 공소 내부로 들어와 온기를 전한다. 해 질 녘이면 석양이 제대 중앙 십자가를 바로 감싸 더욱 온화한 느낌을 준다.
공소 내부는 여느 공소처럼 단조롭다. 제단은 제대를 중심으로 뒤편에 십자가와 그 양쪽 창틀에 ‘예수 성심상’과 ‘성모상’을 장식해 두었다. 회중석보다 제단 폭을 줄여 양쪽에 고해실과 제의방을 뒀다. 그리고 모든 창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 형상의 색유리화를 설치해 놓았다. 너른 마당과 맞닿은 산비탈에 성모상을 조성해 놓았다.
귀래공소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무시는 성소이다. 지금도 귀농하는 젊은이들이 조금씩 늘어나 그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와 새로운 만남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