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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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속에도 희생자 ‘부활’ 위한 유골 찾기는 계속된다

[부활특집] 조세이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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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5일, 수몰사고 82년 만에 ‘새기는 모임’이 발굴해 개방한 조세이탄광 본갱도 입구.
013년 2월 2일 건립된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추도비’.

한반도와 지척인 일본 혼슈 최서단 야마구치현, 그 남서쪽 끝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 아직 냉기가 가시지 않은 지난 3월 11~13일 기자는 사흘 내내 매서운 바닷바람과 싸우며 이 적막한 모래사장을 찾았다. 84년 전인 1942년 2월 3일, 강제동원된 조선인을 포함해 광부 183명이 수장된 조세이(長生) 탄광의 ‘흔적’을 찾아서다. 바로 배기·배수시설인 ‘피야(ピヤ, 영어 Pier에서 유래)’다.

바다 한가운데 솟은 원기둥 ‘피야’ 표면은 파도와 소금기에 짓무른 흉터로 야속한 세월을 드러내고 있었다. 석탄 1톤을 캐기 위해 10배가 넘는 바닷물을 빼내야 했던 해저 탄광에서 피야는 ‘심장’이자 숨통이었다. 피야 2기만이 차가운 바닷속에 희생자가 잠들어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본지는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고통의 우리 역사를 마주했다. 함께 희생자를 진정한 부활로 승화시킬 수 있겠다고 여겼다.
 
이시다 카즈마(22)씨


우베의 차가운 바다, ‘피야’가 증언하는 비극

우베시가 2019년 이곳에 세운 안내판에는 “석탄은 ‘검은 다이아몬드’라 불릴 만큼 많은 이익을 가져다줬다”면서 “사고로 많은 사람이 희생된 역사가 있다”고 적혀 있다. 조세이탄광 희생자 4분의 3인 136명이 ‘한반도 출신’이라는 사실은 포함됐지만, 일제의 침략 전쟁에 강제 동원됐다는 진실은 없었다.
1942년 야마구치현 내 탄광의 조선인 채용률은 평균 9.3. 반면 조세이탄광은 무려 75를 넘어 ‘조선탄광’으로 불렸다. 잦은 누수로 무척 위험했기에 조선인을 투입한 것이다. 수몰 사고는 태평양 전쟁 당시 법을 어기면서까지 채굴량을 늘리려던 일본 정부와 기업의 과욕이 부른 예견된 인재(人災)였다. 그들은 규정을 무시한 채 얇은 지층까지 파냈고, 갱도 천장을 받치는 석탄 기둥마저 깎아냈다. 결국 갱구 내부 천장이 무너져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안내판엔 빠진 내용이다.

이 무거운 바다를 홀로 응시하던 대학생 이시다 카즈마(22)씨는 “지난 1월 한일정상회담에서 희생자 유골 DNA 감정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는 뉴스를 보고 찾아왔다”면서 “사실 제 또래들은 이 문제를 잘 모를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유골을 기다리는 유족분들의 연세가 많으실 텐데, 양국이 우호적으로 문제를 빨리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82년 만에 열린 ‘바다 무덤’의 문, “어이, 들리나!”

역사의 아픔을 삼킨 바다 인근 육지 해안가. 피야가 정면으로 보이는 ‘갱구광장’에 조세이탄광 본갱도 입구가 흙탕물에 반쯤 잠긴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폭 2.2m, 높이 고작 1.6m였다.

84년 전 그날, 고향에 가족을 두고 끌려온 조선인 청년들을 비롯한 희생자들은 이 캄캄한 사지(死地)로 걸어 들어갔다. 탄차 선로가 있어 한두 사람이 겨우 지날 좁은 길을 줄지어 움직였다. 하지만 바닷물이 천장을 뚫고 덮치던 순간, 회사는 고가의 기계가 망가질까 봐 갱구 문을 밖에서 잠가버렸다. 이들의 목숨은 기계 부속품보다 못했다.

사고직후 폐쇄돼 땅에 파묻힌 갱구를 찾아낸 주인공은 한국 유족과 연대해온 일본 시민단체였다. 올해 설립 35돌을 맞은 ‘조세이탄광 물비상(수몰사고)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하 ‘새기는 모임’)이다. 2018년 유족들의 유골 수습 요구에 일본 정부가 ‘유골 위치를 알 수 없어 어렵다’고 변명하자 직접 발굴에 나섰다. 유골 한 조각이라도 나온다면 정부가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시민 성금으로 중장비를 빌려 2024년 9월 24일 드디어 갱구를 처음 파냈다. 도면상 위치는 잡초로 뒤덮여 있었고, ‘탄광의 신’을 모시던 신사의 콘크리트 기단만이 유일한 흔적이었다. 이튿날 82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갱구는 희생자들의 영혼 같은 엄청난 바닷물을 토해냈다. 그때 ‘새기는 모임’ 운영위원 모리 노리후사(76)씨는 캄캄한 구멍을 향해 산 사람에게 말하듯 외쳤다. “어이, 들리나!”

“저는 유골에 영혼이 깃들어 지금도 살아있다고 확신합니다. 추운 날 갱구에 오면 ‘이렇게 추운 날에도 일했겠구나, 정말 추웠겠어’라고 말을 걸고 싶어집니다. 한여름엔 ‘이렇게 더울 때 매일 석탄을 캤구나’ 하고요.”

파낸 흙더미는 ‘피야가 보이는 언덕’이 됐고, 광장에는 발굴된 파편들이 전시됐다. 배 파편을 이용한 한글 안내판도 모리씨 작품이다. 수시로 현장을 찾는다는 그의 눈빛엔 깊은 연민이 서려 있었다.


의로운 대만 잠수사의 죽음 “끝까지 완수해 주세요”

갱구는 열렸지만, 안쪽 200m 지점이 붕괴돼 막혀 있었다. 유골을 찾으려면 피야를 통해 바다 밑으로 내려가 갱도에 진입해야 했다. 수중 조사 역시 시민 모금으로 성사됐다. 마침내 지난해 8월 한국인 잠수사 김경수·김수은씨가 두개골 등 첫 유골을 수습했다. 석탄처럼 검게 변했으나 형태는 온전했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이들은 추가로 4구의 시신도 확인했다.

이어 올해 2월 6일 의로운 일에 동참한 다국적 잠수팀이 두 번째 유골 수습에 성공했다. 그러나 기적 이튿날, 대만 출신 잠수사 쉬웨이(57)씨가 수중 조사 중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발생하며 조사는 무기한 중단됐다.

비통함에 빠진 ‘새기는 모임’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지난 3월 6일 대만 장례식에서 쉬씨의 부인이 새기는 모임의 이노우에 요코(76) 대표에게 건넨 당부였다. “남편이 자원봉사에 참여한 이유는 더 많은 사람을 돕고 싶어서였습니다. 이 의미있는 프로젝트가 멈춰서는 결코 안 됩니다. 부디 남편의 뜻을 이어 끝까지 이 일을 완수해 주십시오.”



꺾이지 않는 욥과 나무, 이제는 일본 정부가 답할 때
쉬씨 장례식에 다녀온 모리씨는 굳은 결의를 보였다. “수중 조사를 두고 여론이 갈리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위험하니 그만두라’는 여론이 많아져도 우리 바람을 관철해야 한다는 각오입니다. 중요한 건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정한 ‘마음의 화해’입니다.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이 양국의 미래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성경을 자주 읽는다며 ‘욥기’를 언급했다. “하느님이 계신다면 ‘새기는 모임’과 유족들이 욥과 같은 시련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욥기에 ‘나무는 잘리고 뿌리가 늙어도 물기를 느끼면 싹이 트고 묘목처럼 가지를 뻗는다’는 구절이 있죠. 그 말씀을 새기고 나아갈 겁니다.”

모리씨는 “안전하게 유골을 꺼낼 확실한 공법이 있다. 갱도 안의 물을 다 빼는 것”이라며 “하지만 이는 비용적으로 민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국가의 몫이기에 생명의 존엄을 최우선으로 일본 정부가 책임지고 한국 정부와 공동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두 개의 비석 - ‘감사’와 ‘사죄’, ‘순난자’와 ‘희생자’

갱구광장 인근 옛 탄광 귀빈용 식당 자리에 비석이 하나 있었다. 사고 40주기인 1982년 세워진 ‘조세이탄광 순난자(殉難者)의 비’다. 사고 직후 은폐됐던 비극을 1976년 처음 세상에 알린 야마구치 다케노부(1931~2015, ‘새기는 모임’ 초대 대표) 선생의 논문이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 비석에는 치명적인 침묵이 존재한다. 사망자 74가 조선인인데도 ‘조선인’이나 ‘강제동원’이란 단어가 쏙 빠졌다. 지역 경제 발전에 대한 ‘감사’를 담아 ‘국가를 위해 몸 바친 행위(순난)’로 포장했다. 비석은 이렇게 끝난다. “영원히 잠들라, 편안하게 잠들라, 탄광의 사나이들이여.”

반쪽짜리 위령비를 등지고 도보로 약 10분, ‘새기는 모임’이 일본인의 사죄를 담아 2013년 조성한 ‘추도광장’에 닿았다. 한일 모든 희생자의 이름을 담은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추도비’가 자리한 곳이다. 피야를 본뜬 추도비 양쪽 기둥에는 ‘강제동원 한국·조선인 희생자’와 ‘일본인 희생자’라고 새겨졌다. 이 광장은 조선인에 대한 폭력의 진상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조세이탄광 현장견학에서 ‘새기는 모임’ 운영위원 모리 노리후사씨가 참가자들에게 사고 당시 정황을 설명을 하고 있다.


본명을 찾아주며 시작된 연대, 남북한과 일본이 함께 이어가야

일본 측 기록상 ‘창씨개명’이 아닌 조선인 전원의 ‘본래 이름’을 찾아 추도비에 새기는 것. 이는 1991년 ‘새기는 모임’ 발족 때부터의 목표였고, 마침내 결실을 이뤘다. 유족을 수소문해 남북한에 보낸 118통의 편지는 “덕분에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처음 알았다”는 답장 17통으로 돌아왔다. 한국에도 유족회가 결성돼 35년간 우정을 잇고 있다.

추도광장에서 만난 ‘새기는 모임’의 유일한 재일동포 운영위원 김정원씨의 눈빛은 남달랐다. 1980년대 도쿄 등에서 기자로 일하며 강제동원 역사를 좇던 그는 1990년 재일동포들의 증언집을 펴냈다. 야마구치현으로 이사 온 뒤에도 강제동원 역사를 공부하다 1995년 ‘새기는 모임’에 합류했다. 그는 추도광장 조성 일화를 들려줬다. “부지를 찾는 데 10년이 걸렸어요. 마침내 적합한 곳을 찾았을 때, 일본인 회원 5명이 자발적으로 비용을 댔죠. 모자란 돈은 제 친구 어머니를 비롯한 재일동포들이 ‘일본인들도 헌신하는데 가만있을 수 없다’며 십시일반 보탰죠.”

‘새기는 모임’은 추도비 건립 이듬해인 2014년 ‘희생자 유골을 찾아 유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새 목표로 세웠다. 김 위원은 “희생자 중 오늘날 북한 출신도 5명 있고, 최근 강원도 창도군에 사는 유족도 찾았다”며 “일본과 북한이 미수교 상태지만, 인도적 차원에서 유골을 찾아 돌려보내는 것은 인간 존엄 회복과 한반도 전체의 문제”라고 역설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 야마구치는 보수 성향이 매우 강한 지역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활동에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김 위원은 “꾸준히 진정성 있게 지역 사회와 관계를 맺어온 덕분”이라며 “조선인을 동정하고 활동을 지지하는 어르신들이 많다”고 했다.


20대 청년의 용기 있는 목소리, 희망을 잇는 세대

2030 젊은 일본인 회원들이 전국적으로 늘어나는 점은 ‘새기는 모임’의 가장 큰 희망이다. 3월 13일 조세이탄광 현장견학에도 여러 청년이 참여했다. 구마노 고에이(26)씨는 도쿄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그의 역사적 각성은 뜻밖에도 ‘K팝’에서 시작됐다. 고교 시절 한국 문화에 빠져 대학생 때 일본군 위안부 활동가와 재일동포를 만나며 역사의 무게를 깨달은 그는 한국 서강대에서 유학하기도 했다.

“추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갱구를 보니 정말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바다 아래서 조선인 광부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조차 안 됩니다. 일본인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느낍니다.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일본 정부에 유골 수습과 반환을 계속 촉구할 것입니다. 한국 분들도 일본 정부가 제대로 나서도록 더 강하게 요구해주셨으면 합니다.”




“역사를 마주하는 일이 일본을 변화시킬 유일한 길”
이노우에 요코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대표


인터뷰 | 이노우에 요코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대표 

35년째 조세이탄광의 비극을 알리는 데 투신해온 이노우에 요코(76) ‘새기는 모임’ 대표. 창립회원인 그는 2014년 제2대 대표가 돼 사고 82년 만에 갱구를 열고, 첫 유골 수습을 진두지휘했다. 왜 일본인으로서 이토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졌는지 물었다.
“제 아버지는 중일전쟁에 참전했다가 상이군인이 되어 돌아오셨습니다. 국가의 든든한 보상 덕에 저는 대학까지 무사히 마쳤습니다. 하지만 일제에 강제로 끌려와 차가운 바다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조선인들은 구출은커녕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 불공평함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평생 저를 움직였습니다.”

그가 강제 동원의 뼈아픈 역사를 안 것은 10대 시절 한 권의 책을 통해서였다. “제 고향 나가노현 역시 조선인 유골이 야산에 버려진 강제 노동현장이란 걸 알았습니다. 주변에 일본 이름을 쓰던 재일조선인 친구들이 얼마나 속으로 마음 아파했는지 모른 채 지내왔던 겁니다. 일본 교육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남편 직장 때문에 이사 온 야마구치현에도 조선인 강제동원의 비극이 서려 있었다. 재일조선인 인권운동을 하다가 ‘새기는 모임’ 창립회원이 됐다. 그가 이 긴 싸움에 인생을 바친 이유는 명확했다. 견고한 ‘망각의 벽’을 깨기 위해서다.
“일본 사회는 정부와 국민 모두 과거의 가해 사실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긴 역사를 안고 있습니다. 조세이탄광의 비극을 통해 충격적인 진실을 널리 알리고, 일본이 저지른 죄를 밝혀나가는 작업이 꼭 필요했습니다.”
조세이탄광을 ‘생명’의 과제로 바라보는 이노우에 대표는 한국과 일본 가톨릭교회가 보여준 연대에 깊은 감사를 전했다.

“가톨릭교회에서 현장을 찾아 기도해주시고 큰 기부를 해줘 정말 기뻤습니다. 특히 한국 주교회의가 보내준 1000만 엔은 한 번에 이렇게 큰돈을 받는 게 처음이라 놀랐습니다. 생명을 다루는 이 숭고한 일에 더 많은 종교계가 함께 나서주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새기는 모임의 모든 활동은 개인후원으로 이뤄진다. 이노우에 대표는 “6000명 넘는 일본·한국 시민들이 6000만 엔에 가까운 큰돈을 모아줬다. 국경을 넘은 연대에 감사할 따름”이라고 전했다.

바다를 오간 30여 년의 세월은 켜켜이 쌓인 ‘미움’을 ‘화해’로 바꾸는 시간이기도 했다. 초창기부터 매년 한국 유족들을 일본으로 초대해 숙식을 함께하며 슬픔을 나눴던 이노우에 대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일화를 꺼냈다.

“‘평생 일본을 원망해 일본 제품은 사지도 않았다’던 유족분이 훗날 한국에 찾아간 제게 따뜻한 커피를 타주시며 ‘이노우에씨와 교류하며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하시더군요. 어떤 유족분은 ‘아버지를 죽게 한 일본은 원수의 나라였지만, 아무 상관없는 일본인들이 유골을 찾아주려 애쓰는 모습에 그 원망이 사라졌다’고 하셨죠. 그 말씀이 지금까지 저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입니다.”

이노우에 대표는 6차례나 수중 조사를 한 끝에 마침내 2025년 8월 첫 유골이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 “정말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하다는 사죄의 마음과 그 모습 그대로 기다려주셨다는 감사함에 가슴이 무척 먹먹했다”고 회고했다.
이노우에 대표는 유골이 가진 강력한 ‘진실의 힘’을 믿는다. 당장에라도 일본 정부가 유골 DNA 감정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게 그의 목소리다.

“이 목소리 없는 유골 자체가 일본 식민 지배 역사의 산증인입니다. 억울한 유골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며 가해 역사를 똑바로 마주하는 과정은 일본 사회를 변화시킬 유일한 길입니다. 바다 아래 남은 유골 한 구 한 구가 세상에 나올 때마다 일본 정부는 더는 진실에서 도망칠 수 없는 외통수로 몰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조세이탄광의 진실을 배우며 자란 아이들은 결코 혐오나 차별을 일삼는 어른으로 자라지 않을 것이라 믿기에 우리는 절대 여기서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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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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