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냐 산토 스테파노 광장의 ‘일곱 성당’ 복합 성지. 흔히 산토 스테파노 바실리카로 불린다. 중앙 정면은 8세기의 성 십자가 성당, 그 왼편의 낮고 둥근 건물은 예루살렘 성묘를 본뜬 성묘 성당, 더 안쪽에는 가장 오래된 성 비탈리스와 성 아그리콜라 성당이 이어진다. 뒤로 삼위일체 성당, 중세 수도원과 회랑 등이 겹쳐있다. 현재 볼로냐대교구 성지로 작은 형제회가 순례 사목을 맡고 있다.
포르티코 아래를 걷는 순례길
신자라면 누구나 한번은 가고 싶어 하지만 선뜻 가기 힘든 곳이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예루살렘이 그런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중세에도 전쟁 등으로 성지 순례가 어려워지자 유럽 곳곳에는 예루살렘을 재현한 장소들이 생겨났습니다. 북이탈리아의 중요한 철도 거점인 볼로냐도 그중 하나입니다.
볼로냐는 ‘볼로냐 스파게티’로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국제 어린이 도서전 같은 뚜렷한 목적이 없다면 스쳐 지나치기 쉬운 곳입니다. 보통 로마 중심의 순례에 치중하기에 피렌체 이북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남북을 가로지를 일이 있다면, 잠시라도 들러보길 권합니다. 미식의 도시라는 명성 뒤에 ‘일곱 성당 복합체’라는 독특한 형태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기억을 응축해 놓은 성지가 도심 한복판에 있습니다.
볼로냐 중앙역에서 남쪽으로 향하면, 붉은 벽돌 건물과 아케이드, 광장과 탑들이 촘촘히 맞물린 거리가 시작됩니다. 오랜 대학 도시답게 포르티코 아래에는 학생과 시민·관광객이 자연스럽게 뒤섞입니다. 비를 피하고 햇빛을 가려주는 도심 곳곳의 포르티코는 실용적인 구조물인 동시에 거리 전체를 하나의 긴 실내처럼 연결하는 볼로냐만의 특별한 공간입니다.
여행자들은 흔히 마조레 광장의 산 페트로니오 바실리카를 먼저 떠올릴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길이 132m, 너비 60m, 높이 44m에 달하는 거대한 고딕 성당으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보다 더 크게 지으려 했던 볼로냐 시민들의 자부심이 담긴 곳입니다. 미완성의 외관조차 강렬해 볼로냐 인증샷의 명소가 되곤 하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볼로냐의 오랜 중심은 마조레 광장을 지나 주택가 정적 속에 숨어 있는 복합 성지 산토 스테파노 바실리카입니다.
산토 스테파노 성지의 성묘 성당. 5세기 페트로니오 성인이 예루살렘 성묘를 본떠 세웠다. 10세기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파괴된 것을 11세기 초 베네딕도회가 재건했다. 팔각형 중심부에는 페트로니오 성인의 무덤 위에 세운 제단 겸 강론대가 자리하고 있다.
여러 겹의 시간을 흐르는 신앙의 요람
마조레 광장의 볼로냐가 활기찬 시민들의 공간이라면, 산토 스테파노의 볼로냐는 깊고 오래된 신앙의 공간입니다. 거대한 성당을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이곳은 어떤 큰 성당 하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의 크고 작은 성당들과 전례 공간, 회랑들이 잇대어 하나의 복합 성지를 구성하고 있어 겉으로는 그리 돋보이지 않습니다. 덕분에 마치 여러 겹의 시간을 차례로 통과하듯 성지에 들어서게 됩니다.
정면에는 4세기의 성 비탈리스와 성 아그리콜라 성당, 5세기 성 페트로니오가 예루살렘 성묘를 본떠 세운 성묘 성당, 8세기의 성 십자가 성당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곳의 시작은 볼로냐의 첫 순교자 성 비탈리스와 성 아그리콜라의 기억이었습니다. 393년 두 성인의 유해가 발견된 뒤 세워진 봉헌 성당이 그 뿌리입니다. 산토 스테파노라고 불리게 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싶은 이 성지에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성인 공경이 자연스럽게 결합한 결과일 것입니다.
산토 스테파노의 성십자가 성당. 8세기 롬바르드 시대 세워진 단일 본랑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계단 아래는 11세기 초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조성한 두 순교자의 성해를 모신 지하 소성당이 자리한다. 현재의 주 제대 공간은 17세기 중엽 바로크 양식으로 리모델링되었다.
빌라도의 뜰과 베드로의 수탉(사각형 안). 성묘 성당 뒤편에 그리스도의 사형 선고 장소를 재현한 공간이다. 중앙의 석조 수반은 737~744년에 제작된 ‘빌라도의 대야’다. 회랑 창 아래 기둥에는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부인한 뒤 닭이 울었다는 복음의 장면을 형상화한 14세기의 수탉 석조물이 남아 있다.
수난과 무덤, 그리고 적막의 기억
먼저 절제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십자가 성당으로 들어섭니다. 높은 계단이 있는 주 제대가 눈에 띕니다. 어두운 목조 천장 아래 낮고 긴 본랑 끝에서 빛의 공간이 열리는 듯합니다. 계단 아래 증거자 소성당에 두 순교 성인의 성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본래 이 성당은 성 요한 세례자 성당으로, 롬바르드 시대인 8세기에 세워졌습니다.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본 뒤 11세기 초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 의해 재건되었습니다. 당시 수도자들은 성해를 좀더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지하 소성당을 새롭게 조성했는데, 그것이 지금 소성당 모습이지요. 지금과 달리 중세에는 수도원 회랑에서 소성당으로 드나들 수 있어 성해 보호에 수월했습니다.
이제 ‘빌라도의 뜰’로 나갑니다. 회랑과 벽돌 기둥, 베드로를 울게 했던 수탉 상이 보입니다. 판결과 머뭇거림, 침묵과 후회의 기억은 우리 삶의 단면을 비추는 듯합니다. 이어지는 성묘 성당은 원형과 팔각형, 묵중한 기둥들이 조화를 이룬 공간입니다. 어둑한 빛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거친 돌의 표면은 여기가 ‘무덤을 기억하는 장소’임을 알려줍니다. 화려한 연출 대신, 그저 돌의 공간에서 부활 전야의 적막 속에 머물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 비탈리스와 성 아그리콜라 성당. 복합 성지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바실리카 평면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11세기 재건 당시 벽돌 기둥과 아치가 추가되었다. 과거 이시스 신전에 사용되던 주두와 순교자들의 초기 중세 석관 등을 볼 수 있다.
도시 한복판에서 마주하는 부활
성 비탈리스와 성 아그리콜라 성당에 들어서면 공기가 달라집니다. 텅 빈 공간 속 시선은 깊숙한 곳의 제대 십자가로 향합니다. 죽음의 자리가 끝내 생명을 향해 열려 있음을 느낍니다. 앞선 공간이 침묵과 죽음의 자리였다면, 볼로냐의 초기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이곳은 닫힌 숨이 열리고,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내디딜 용기를 주는 곳입니다.
오래된 수도원 2층 회랑 사이로 내비치는 고요한 빛 속에서 서 봅니다. 11세기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무너진 성당을 다시 세우면서 기도와 노동, 성해 공경과 순례가 이어지는 삶의 질서를 함께 심었습니다. 수도자들은 매일 회랑을 오가며 시편을 바치고, 침묵 속에서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되새겼을 것입니다. 긴 기다림과 규칙적인 기도, 그리고 인내 끝에 맞이하는 새벽. 부활은 한순간의 승전고가 아니라, 우리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시간임을 산토 스테파노는 들려줍니다.
<순례 팁>
※ 볼로냐는 로마·피렌체·밀라노를 잇는 이탈리아 고속철의 요충지다. 로마에서 2시간 30분, 밀라노에서 1시간 소요. 볼로냐 중앙역에서 주교좌 성당인 산 피에트로 대성당, 마조레 광장의 산 페트로니오 바실리카를 거쳐 산토 스테파노 성지까지 2㎞ 도보 이동(25분).
※ 성 십자가 성당 미사 전례 : 주일 및 대축일 9:30·12:00·18:30 평일 08:30·18:30(8월은 저녁 미사만)
※ 혼자 가시기 힘든 분을 위해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마련한 2026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