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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순 주교 곁에서, 장일순은 묵묵히 원주를 일궜다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선한 목자 옆에 있던 착한 평신도, 장일순 요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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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요한).

장일순 부채 서화, 십일면군자난화


손자에게 절한 할아버지

소작인에게 땅 돌려준 아버지

그 집에서 난 사람이 장일순이었다




동반자 같던 두 사람,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1990년 6월 24일 원주교구 설정 25주년 행사가 지학순 주교의 사목 표어인 ‘빛이 되어라’라는 주제로 진광중고등학교에서 열렸다. 이날 김수환 추기경은 지학순 주교를 “인간 존엄성과 사회정의를 위해서 복음 정신에 입각해 헌신하신 분”으로 소개하였다. 지학순 주교는 원주에 처음 왔을 때 원주교구를 “바위틈에 피어나는 꽃순 같다”고 했다. 그 꽃을 잘 가꾸고 키워낸 사람이 지학순 주교였는데, 그 곁에서 늘 보이지 않게 동반자처럼 자리매김하던 이가 장일순(요한)이었다. 그때 주교가 45세, 장일순은 38세였다.

이날 지학순 주교는 “우리 교구는 스물다섯 살의 나이고, 이제는 이 지역 사회 안에서 더욱 책임을 지고 사회를 정화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애정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당부하였다.

 
1972년경 주교관에서 환담시.


그해 9월 8일에 서울 명동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지학순 주교 고희 기념미사와 기념식이 있었다. 여기서 지 주교는 사도 바오로처럼 “달릴 길을 다 달렸다”고 말해 청중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당시 지 주교는 당뇨병으로 눈이 흐려져 미사 경문조차 잘 읽지 못했다. 이날 장일순이 지학순 주교에게 부채에 써서 선물한 서화가 ‘十一面君子蘭花(십일면군자난화)’였다. 불교의 십일면관음보살을 ‘십일면군자란’으로 유추한 상상력의 결과이다.

보살(菩薩)이란 불교 용어이며, 군자(君子)는 유교의 용어다. 그런데 장일순은 가톨릭 주교인 지학순을 “보살이며 군자”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대승불교에서 십일면관음보살은 열한 가지 얼굴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착한 중생을 보고 자비심을 일으켜 기쁨을 주고, 측은지심을 일으켜 민중을 고통에서 구원한다. 이 모습은 장일순이 바라는 삶이고, 지학순 주교가 얻으려던 이상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1993년 3월 12일 73세로 선종하였고, 얼마 후 장일순은 의지할 동지를 잃은 슬픔과 외로움을 필묵에 담았다. 장일순은 애도하는 슬픈 얼굴의 난초를 그렸는데, 여기에 ‘孤 懷池學淳 主敎’(고 회지학순 주교), “외롭습니다. 지학순 주교를 그리워하며”라고 적었다. 이듬해인 1994년 5월 22일에 장일순도 선종하였으니, 원주 사람들은 단짝이며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원주를 채색했던 두 어른을 한꺼번에 잃은 셈이다.

그래서 장일순의 이야기는 지학순 주교의 이야기이며, 한 분은 교회의 아버지로 앞에 나서고, 한 분은 교회의 어머니로 뒤에 남아 은닉된 복음을 살았다. 선한 목자 옆에 착한 평신도가 있었다. 목자는 양의 음성을 단박에 알아듣고,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잘 기억한다. 사실상 굳이 양이랄 것도 없고, 목자랄 것도 없이, 복음이 바라는 낮꿈을 함께 꾸었던 사람들이 모여 한때 원주교구를 일구었다.

 
1960년 10월 부친 장복흥 회갑사진.


손자 상여에 넙죽 절한 할아버지

장일순은 1928년 10월 16일(음력 9월 3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 406번지에서 아버지 장복흥과 어머니 김복희 사이의 6남매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일순의 할아버지 여운(旅雲) 장경호는 포목상을 하면서 집안 살림을 크게 일으켰다. 원주 시내 곳곳에서 농지를 사들여 지주가 되었고,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아 원주초등학교와 원주농업고등학교를 설립할 때 토지를 기증하기도 했다.

당시 장일순이 태어난 집은 500평 정도 부지에 안채로 기와집을 들이고, 바깥채는 초가집을 지었다. 사랑채에는 늘 손님들이 북적였는데, 집안에 환대의 기풍이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장일순이 무시로 찾아드는 이들을 봉산동 집에서 환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원주 봉산동 일대.


한편 장일순의 할아버지는 서울을 오가며 신식 문물을 익히고, 독립운동가들과 교제했는데, 주변에서 학교를 세운다면 땅을 내주고, 동네에 물이 마르면 우물을 고쳐주고, 보릿고개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었다. 그렇지만 장일순에게 가장 충격적인 경험은 열다섯 살 먹은 형이 죽어서 상여가 나갈 때였다. 할아버지가 상여를 향해 길바닥에 엎드려 넙죽 절을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장일순이 “할아버지, 왜 손주에게 절을 하세요?” 하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네 형이 이 세상에서는 내 손자였지만 저승에서는 저분이 선생이야. 먼저 가시지 않았니” 하셨다. 이를 두고 장일순은 “인간을 공경하는 마음을 심어주려 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 장복흥 역시 관대한 분이었다. 소작인들이 돈을 꿔주고 제때 갚지 못해도 독촉하는 법이 없었고, 논밭에 나가 작황을 살피지 않고 소작인들이 가져오는 대로 도지를 받았다. 소학교에 다니던 장일순·화순 형제에게는 찬밥을 주더라도 장일순 집안의 논밭을 부쳐 먹는 소작인들이 찾아오면 꼭 새로 따뜻한 밥을 지어주었다. 중요한 것은 땅의 ‘소유권’이 아니라 누가 ‘일’을 하는가였다. 훗날 장일순은 원주 시내에서 장사하는 제자들에게 손님을 가리켜 “저 사람이 하느님이여! 저이들이 아니면 너희가 먹고살 수 없잖아” 하였다. 동냥을 얻으러 온 걸인을 보면 할아버지가 며느리를 불렀다. “얘, 어멈아, 손님 오셨다.” 그러면 어머니는 바로 숟가락을 놓고 일어나 동냥 그릇을 들고 온 이에게는 밥과 찬을 담아주었고, 빈손으로 온 이에게는 윗방에 따로 상을 차려 대접했다.


 
장일순 서화, 하심공경


아버지 따라 천주교 세례를 받다

장일순이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것은 1940년 봄이었다. 원주봉산심상소학교를 졸업한 장일순은 아버지를 따라 원동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할아버지는 큰 사찰의 시주(施主)이기도 했는데, 집안이 천주교로 개종하게 된 것은 열다섯 살에 죽은 맏손주 장철순 때문이었다. 그 손주가 죽으면서 자신을 천주교 묘지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당시 조상제사를 금하던 천주교의 사제를 만나 제사는 지낼 수 있도록 관면받는 조건으로 세례를 받았다.

1945년에 해방이 되면서, 사회적으로 가장 큰 관심거리가 농지개혁이었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에야 농지개혁법이 시행되었다. 당시 장일순의 집안은 대농 수준으로 원주 지역에 제법 많은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장일순의 아버지 장복흥은 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법이 시행되기 전에 이미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나눠주면서 등기 이전까지 다 해주었다. 농토를 거저 받은 소작인 입장에서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지주였던 장일순 일가는 한 사람도 인민군에게 끌려가거나 다치지 않았다. 예전 소작인들이 서로 자기 집에 와서 숨으라고 은신처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원주 지역에서 지주 가족이 무사한 집은 그 집뿐이었다. <계속>

 


한상봉(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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