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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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고 끝낸 장일순, 지학순 주교와 교구청 밖에서 머리를 맞댔다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선한 목자 옆에 있던 착한 평신도, 장일순 요한 - (2) 좌절된 정치, 다시 만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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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경 대성학교. 손수 새긴 교훈비 ‘참 되자’ 옆에 선 장일순.


평신도 중심 교회 꿈꾼 지학순 주교

군사정권 사찰 대상이던 장일순 찾아내



일주일에 한 번씩 은밀히 만나

원주교구 혁신할 밑그림 그려

비신자 행정가 발탁해 교구 기틀 닦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마지막 회기를 앞둔 1965년 3월 22일 춘천교구에서 원주시, 원성군, 영월군, 삼척군, 정선군, 울진군을 분리해 한국의 14번째 교구로 원주교구가 설정되었다. 그리고 1965년 6월 29일 원주교구 주교좌 원동성당에서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이 있었다. 이 엄청난 사건의 중심에 지학순 주교가 있었다. 지학순 주교는 교구장이 되면서 사목표어를 ‘빛이 되라’(Fiat Lux)로 정했는데, 1968년 성탄 메시지를 보면 그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믿음의 생활이 교회 안에서는 물론 교회 밖으로 흘러 나아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안으로부터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공의회 마지막 회기에 참여할 수 있었던 지학순 주교는 시대의 징표에 민감한 교회를 만들고 싶어 했다. 공의회 정신에 따라 “이제 교회는 과거와 같이 하느님의 백성(신자)을 다스리는 성직자들의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는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자들 역시 교회 안에서 성직자들의 지배를 받는 집단이 아니라 자기들이 바로 교회 구성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깨닫고 교회에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신자들은 먼저 하느님을 진실히 깨달아 이 깨달음이 힘찬 생명으로 밖으로 솟아 나와 하느님을 공경하며 남을 자기같이 사랑하는 봉사의 행위로써 사회생활에 나타나야 한다”고 공의회는 말한다.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가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자리 잡기를 희망했는데, 그 길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장일순이었다. 당시 장일순은 4·19혁명 이후 공간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해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소급법인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른 뒤였다. 장일순은 ‘정치활동정화법’으로 사회활동에 제약이 걸려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설립한 대성고등학교 학생들의 굴욕적 한일외교 반대운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성학원 이사장직도 그만두고 포도 농사를 짓고 있었다.

 
1960년 사회대중당 후보 출마시 유인물.


용공분자로 몰려 사회활동 제약

장일순은 시대정신과 정의감에 넘치는 지학순 주교의 강론을 듣고 반하였고, 지학순 주교는 장일순과 사회개혁 사상과 동서양 고전에 관해 속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서로 신뢰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주교가 보기에 장일순은 자신보다 7년 연하였지만,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깊은 지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장일순은 1944년 봄에 배재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이 학교는 이듬해 해방을 맞이하면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바뀌었다. 이때 미군정청이 미군 대령 출신의 해리 비드웰 앤스테드(Harry Bidwell Ansted)를 임명하면서 이른바 ‘국대안 반대 투쟁’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4956명의 학생이 제적되었는데, 그중에 장일순도 끼어 있었다. 다행히 1947년 복적되었지만, 그는 공과대학을 자퇴하고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했다.

한국전쟁 직후에 전쟁을 막을 만한 ‘세계연방정부’를 구상하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과 편지를 교환하며, 평화운동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던 장일순은 복학하지 않고 원주에 남아 한편으로는 교육사업에 투신하고, 한편으로는 직접 정치에 뛰어들었다. 장일순은 죽산 조봉암이 추진하던 진보당에 관심을 가졌으나,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이 제4대 민의원 총선거에 임박해 구속되면서, 무소속으로 총선에 입후보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4·19혁명 이후에는 사회대중당 후보로 원주지역에서 출마했지만 역시 낙선하였다. 장일순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 보수 진영에서 주장해왔던 북진통일론에 반대하고, 국가안보 문제를 정권 유지의 정략으로 악용해온 남북 두 체제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처럼 영세중립국이 되어야 한반도가 전쟁을 피하고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장일순은 용공분자로 몰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당시 상황을 아내 이인숙은 이렇게 기억한다. “5월 18일에 친척 아주머니 한 분이 마당으로 헐레벌떡 들어오더니 애들 아버지가 시내에서 경찰에 붙들려 갔다고 하는 거예요. 무슨 영문인지 몰랐죠. 다음날 형사들이 들이닥치더니 가택 수색한다고 집안을 뒤져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책이며 편지며 심지어 쓰레기통까지 뒤져서 글씨를 쓴 쪽지를 전부 찾아내서 가져가더라고요.” 이 경험 때문에 장일순에겐 나중에도 자기 생각을 글로 남기지 않는 습관이 배었다.

장일순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나이는 33세였다. 3년 전에 결혼한 아내 이인숙은 두 아이를 업고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이때 이인숙이 면회를 다니며 부르던 노래가 손시향의 ‘검은 장갑’이라는 유행가였다. 장일순은 석방된 뒤에도 이 노래를 즐겨 부르곤 했는데, 그는 감옥살이를 ‘인생대학’이라며, 그곳을 수행의 자리로 삼았다. “헤어지기 섭섭하여 망설이는 나에게 / 굿바이 하며 내미는 손 검은 장갑 낀 손 / 할 말은 많아도 아무 말 못하고 / 돌아서는 내 모양을 저 달은 웃으리.”

 
1970년경 원주 가톨릭센타에서.


“핍박받는 이 일으키는 것이 진정한 종교”

지학순 주교를 만나면서 장일순은 정계와 학교를 통해 이루지 못했던 일을 다시 한 번 펼칠 기회를 얻었다. 이런 종교활동은 사찰 당국도 간섭할 수 없을 터였다. 지학순 주교는 장일순이 직접 교회 일에 나서주길 바랐지만, 사찰대상이었던 장일순의 처지가 녹록지 않았다. 대신 장일순은 지학순 주교에게 춘천시청 공보과에 있던 김영주를 소개해주었다. 그는 행정사무에 밝은 사람이라 나중에 교구청 및 주교관 설립에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그런데 김영주는 당시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기에, 교회 안에서 반발도 심했다. 사제들은 물론이고 신자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왔다. 천주교 신자도 아닌 사람이 교구청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냐는 거였다. 이런 원망과 비판이 나올 때마다 지학순 주교는 “내가 믿고 일을 함께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해 공들여 발탁한 사람이니, 그리 알라”며 밀어붙였다.

장일순이나 지학순 주교에게 신자, 비신자 구분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서 혁신적인 일을 처리할 능력이 있는지 여부였다. 신자보다 동지가 급했던 거였다. 당시 지학순 주교는 한 주일에 한 번 정도 장일순을 교구청 밖 은밀한 곳에서 만나 원주교구의 사목방향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때마다 김영주가 옆에서 듣고 적어 두었다. 당시 장일순은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김영주는 전한다.

“종교는 이 세상만사 잡다한 일로부터 뚝 떨어져서 초연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은 오해입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이 나 혼자 구름 위에 앉아있는 것은 개인적인 종교 심성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종교의 역할은 세상에서 핍박받고 고통받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여러 존재들이 각 자리에서 올바로 서서 잘 작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요.” <계속>

 


한상봉(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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