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자라면서 키가 크고 생각이 깊어지는 것처럼, 사회도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거듭한다. 이런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고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게 되면서 인구 고령화가 진행된다. 즉 인구 고령화는 사회의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이며, 오늘날 우리는 전 지구적인 인구 고령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사회 전반을 넘어 교회 공동체 안에도 깊숙이 미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해 10월 바티칸에서는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 주관으로 65개국이 참여한 ‘노인사목 국제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주로 노인의 ‘소외’, ‘버려짐’, ‘빈곤’, ‘학대’ 등이 논의되었는데,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비판해 온 노년을 소외시키는 ‘버려지는 문화(throwaway culture)’의 민낯이기도 하다. 극단적 자본주의의 경제논리와 젊음만을 숭상하는 시각에서 노년은 ‘생산성이 떨어진, 가치 없는 여분의 인생’으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노년이 그렇게 무가치한 시간이라면,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다른 피조물보다 훨씬 더 긴 노년의 시간을 허락하셨을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노년의 시간은 삶과 단절된 잉여의 시간이 아니다. 노년은 삶의 여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완성의 시간이자, 새로운 창조의 시간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버려지는 노년’은 하느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이 빚어낸 서글픈 결과일 뿐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저서 「노년」에서 지적했듯, 역사적으로 노인의 지위는 한 번도 그들 스스로 ‘쟁취한’ 적이 없으며, 사회가 일방적으로 ‘부과한’ 것이었다. 즉 지금의 버려지는 문화는 우리 모두가 노인을 소외시키고 공동체 밖으로 밀어낸 결과인 셈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노년은 젊은 시절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통합하고 ‘존재 그 자체’의 가치를 깨닫는 관조의 시간이다. 신체적 노화로 육체적 힘은 약해질지라도 영적 시야는 더 넓어지며, 인생의 본질적 의미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영적 풍요를 누리는 시간이다. 따라서 우리의 말년을 인간답게 가꾸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노인을 ‘돌봄이 필요한 보조적 존재’만 볼 것이 아니라, ‘곧 우리가 마주할 미래’이자 ‘함께 살아갈 동반자’로 바라보아야 한다. 특히 4세대, 5세대, 더 많은 세대가 공존하게 되는 100세 시대에는 각 세대가 어떻게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함께 나아갈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고민은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는 한국 가톨릭교회와 우리 모두의 과제이기도 하다. 세계청년대회는 단순한 젊은이들의 축제를 넘어, 세대 간 분절을 극복하고 조부모 세대와 청년 세대가 신앙의 유산을 교류하며 연대하는, ‘하느님 백성들이 함께 걸어가는 여정’인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 실천의 장이 되어야 한다. 젊은이들의 미래를 훔치는 노년이 아닌, 평생 닦아온 신앙의 유산과 꺾이지 않는 희망의 증거를 전수하는 노년이야말로 시노달리타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